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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근대문학39

채만식 '태평천하' 30 - 이 고씨는, 말하자면 이 세상...... 이 고씨는, 말하자면 이 세상 며느리의 썩 좋은 견본이라고 하겠습니다.    ---암캐 같은 시어머니, 여우나 꽁꽁 물어 가면 안방 차지도 내 차지, 곰방조대도 내 차지.  대체 그 시어머니라는 종족이 며느리라는 종족한테 얼마나 야속스러운 생물이거드면, 이다지 박절할 속담까지 생겼습니다.   열여섯 살에 시집을 온 고씨는 올해 마흔일곱이니, 작년 정월 시어머니 오씨가 죽는 날까지 꼬박 삼십일 년 동안 단단히 그 시집살이라는 걸 해왔습니다.  사납대서 살쾡이라는 별명을 듣고, 인색하대서 진지리꼽재기라는 별명을 듣고, 잔말이 많대서 담배씨라는 별명을 듣고 하던 시어머니 오씨(그러니까 바로 윤직원 영감의 부인이지요), 그 손 밑에서 삼십일 년 동안 설운 눈물 많이 흘리고 고씨는 시집살이를 해오다가, 작년 정월.. 2024. 11. 4.
채만식 '태평천하' 27 - 윤직원 영감은 그처럼...... 5. 마음의 빈민굴  윤직원 영감은 그처럼 부민관의 명창대회로부터 돌아와서, 대문 안에 들어서던 길로 이 분풀이, 저 화풀이를 한데 얹어 그 알뜰한 삼남이 녀석을 데리고 며느리 고씨더러, 짝 찢을 년이니 오두가 나서 그러느니 한바탕 귀먹은 욕을 걸찍하게 해주고 나서야 적이 직성이 풀려, 마침 또 시장도 한 판이라 의관을 벗고 안방으로 들어갔습니다.   아랫목으로 펴놓은 돗자리 위에 방 안이 온통 그들먹하게시리 발을 개키고 앉아 있는 윤직원 영감 앞에다가, 올망졸망 사기 반상기가 그득 박힌 저녁상을 조심스레 가져다 놓는 게 둘째손자며느리 조씹니다. 방금, 경찰서장감으로 동경 가서 어느 사립대학의 법과에 다니는 종학(鍾學)의 아낙입니다.  서울 태생이요 조대비의 서른일곱촌인지 아홉촌인지 되는 양반집 규수요,.. 2024. 9. 25.
채만식 '태평천하' 21 - 달포 전인데 이 패에게 노략질을...... 달포 전인데 이 패에게 노략질을 당하던 날 밤, 그 중에  한 놈, 잘 알 수 있는 자가 섞여 있는 것을 윤용규는 보아 두었읍니다. 그자는 박가라고, 멀리 않은 근동에서 사는 바로 그의 작인이었읍니다. "오! 이놈 네가!"   윤용규는 제 자신, 작인에게 어떠한 원한받을 짓을 해왔다는 것은 경위에 칠 줄은 모릅니다. 다만 내 땅을 부쳐 먹고 사는 놈이 이 도당에 참예를 하여 내 집을 털러 들어오다니, 눈에서 불이 나고 가슴이 터질 듯 분한 노릇입니다.  이튿날 새벽같이 윤용규는 몸소 읍으로 달려들어가서, 당시 그 고을 원(수령)이요, 수차 토색질을 당한 덕에 안면은 있는 백영규(白永圭)더러, 사분이 이만저만하고 이러저러한데 그 중에 박아무개라는 놈도 섞여 있었다고 그러니 그놈만 잡아다가 족치거드면 그 일.. 2024. 7. 23.
채만식 '태평천하' 17 - 젊은 윤두꺼비는 깜깜 어둔 방 안이라도...... 4. 우리만 빼놓고 어서 망해라-3  젊은 윤두꺼비는 깜깜 어둔 방 안이라도 바깥의 달빛이 희유끄름한 옆문을 향해 뛰쳐나갈 자세로 고의춤을 걷어 잡으면서 몸을 엉거주춤 일으켰습니다. 보이지는 않으나 아내의 황급한 숨길이 바투 들리고 더듬어 들어오는 손끝이 바르르 떨리면서 팔에 닿습니다."어서! 얼른!"   아내의 쥐어짜는 재촉 소리는 마침 대문을 총 개머린지 몽둥인지로 들이 쾅쾅 찧는 소리에 삼켜져 버립니다. "아버님은?"   윤두꺼비는 뛰쳐나가려고 꼬느었던 자세와 호흡을 잠깐 멈추고서 아내더러 물어보던 것입니다. "몰라요...... 그렇지만...... 아이구 어서, 얼른!"   아내가 기색할 듯이 초초한 소리로 팔을 잡아 흝는 힘이 아니라도 윤두꺼비는 벌써 몸을 날려 옆문을 박차고 나갑니다.    신발.. 2024. 6. 15.
채만식 '태평천하' 13 - 물론 아무리 밑질긴 거지가...... 3. 서양국 명창대회 - 4  물론 아무리 밑질긴 거지가 들어와서 목을 매고 늘어진댔자 동전 한푼 동냥을 주는 법은 없지만, 그러자니 졸리고 악다구니를 하고 하기가 성가신 노릇이니까요. 그러므로 만일 쪽문을 열어 놓는 것이 윤직원 영감의 눈에 뜨이고 보면, 기어코 한바탕 성화가 나고라야 마는데, 대체 식구 중에 누가 갈충머리없이 이런 해망을 부렸는지 참말 딱할 노릇입니다.   역정이 난 윤직원 영감이 낙타가 바늘구멍으로 나가는 만큼이나 애를 써서 좁다란 그 쪽문으로 겨우겨우 비비 뚫고 들어서면서 꽝, 소리가 나게 문을 닫는데, 마침 상노아이놈 상남이가 그제야 뽀르르 달려 나옵니다.  이놈이 썩 묘하게 생겼습니다. 우선 부룩송아지 대가리같이 머리가 곱슬곱슬하고 노랗기까지 한 게 장관이요. 그런 대가리가 어.. 2024. 5. 12.
채만식 '태평천하' 11 - 윤직원 영감은 단박 분하고...... 3. 서양국 명창대회 -2  윤직원 영감은 단박 분하고 괘씸하고 창피하고 뭐, 도무지 어떻다고 형언할 수가 없읍니다. 아무리 예법이 없어진 오늘이라 하더라도, 만일 그 자리가 그 자리가 아니고 계동 자기네 댁만 같았어도 이놈 당장 잡아 내리라고 호령을 한바탕 했을 겝니다.   그러나 산전수전 다 겪고 칼날 밑에서와 총부리 앞에서 목숨을 내걸어 보기 수없던 윤직원 영감입니다. 또 시속이 어떻다는 것이며, 그래 아무 데서고 함부로 잘못 호령깨나 하는 체하다가는 괜히 되잡혀서 망신을 하는 수가 있다는 것도 잘 알고 있습니다.   윤직원 영감은 속을 폭신 삭여 가지고 자기 손에 쥔 표를 내보이면서 나도 이렇게 구경을 왔노라고 점잖이 깨우쳐 주었읍니다. 그랬더니 양복신사씨는 윤직원 영감이 생각한 바와는 딴판으로 .. 2024. 4. 28.
채만식 '태평천하' 7 - 기생이며 광대가...... 2. 무임승차기술 - 3   기생이며 광대가 가지각색이요, 그래서 노래도 여러 가지려니와 직접 눈으로 보면서 오래오래 들을 수가 있기 때문에, 감질나는 라디오보다는 그것이 늘 있는 게 아니어서 흠은 흠이지만, 그때그때만은 퍽 생광스럽습니다. 딱히 윤직원 영감의 소원 같아서는, 그런즉슨 명창대회를 일년 두고 삼백예순날 날마다 했으면 좋을 판입니다. 이렇듯 천하에 달가운 명창대횐지라, 서울 장안에서 언제고 명창대회를 하게 되면 윤직원 영감은 세상없어도 참례를 합니다. 만일 어느 명창대회에 윤직원 영감이 참례를 못 한 적이 있다면 그것은 대복이의 태만입니다.  대복이는 멀리 타관에를 심부름 가고 있지 않는 이상 매일같이 골목 밖 이발소에 나가서 라디오의 프로그램과 명창대회나 조선음악연구회 주최의 공연이 있는지.. 2024. 3. 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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