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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글 읽기/채만식-태평천하

채만식 '태평천하' 38 - 이것이 대복이의 주변으로......

by 구름은 자유롭다 2025. 3. 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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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것이 대복이의 주변으로, 종로 일대와 창안 배오개 등지와, 그 밖에 서울 장안의 들뭇들뭇한 상고들을 뽑아 신용 정도를 조사해 둔 블랙리스트입니다. 신용이라도 우리네가 보통 말하는 신용이 아니라, 가산은 통 얼마나 되는데, 갚을 빚은 얼마나 되느냐는 그 신용입니다.  이걸 만들어 놓고, 대복이는 날마다 신문이며 흥신내보(興信內報)며 또는 소식 같은 걸 참고해 가면서, 그들의 신용의 변동에 잔주〔註解〕를 달아 놓습니다.

  그러니까 생기기는 아무렇게나 백지로 맨 한 권의 문서책이지만, 척 한번 떠들어만 보면, 어디서 무슨 장사를 하는 아무개는 암만까지는 돈을 주어도 좋다는 것을 휑하니 알 수가 있는 것입니다.

 

  윤직원 영감은 시골 사람, 그 중에도 부랑자가 돈을 쓴다면 으레 매도계약까지 첨부한 부동산을 저당 잡고라야 돈을 주지만, 시내에서 장사하는 사람들한테는 대개 수형을 받고서 거래를 합니다. 그는 수형의 효험과 위력을 잘 알고 있으니까, 안심을 합니다. 세상에 수형처럼 빚 쓴 사람한테는 무섭고, 빚 준 사람한테는 편리한 것이 없답니다. 기한이 지나기만 하면 거저 불문곡직하고 수형 액면에 쓰인 만큼 차압을 해서 집행딱지를 붙여 놓고는 경매를 한다나요. 가령 그게 사기에 걸린 돈이라고 하더라도, 수형이고 보면 안 갚고는 못 배긴다니, 무섭지 않고 어쩌겠습니까.

  윤직원 영감은 이 편리하고도 만능한 수형장사를 해서 매삭 이삼만 원씩 융통을 시키고, 그 이문이 적어도 삼천 원으로부터 사천 원은 됩니다. 일 할 이상 이 할까지나 새끼를 치는 셈이지요. 송도 말년(松都末年)에는 쇠가 쇠를 먹었다고 합니다. 그러던 게 지금은 다 세태가 바뀌고, 을축 갑자(乙丑甲子)로 되는 세상이라서 그런 것도 아니겠지만, 쇠가 쇠를 낳기로 마련이니 그건 무슨 징조일는지요.

   아무튼 그놈 돈이란 물건이 저희끼리 목족(睦族)은 무섭게 잘 하는 놈인 모양입니다. 그렇길래 자꾸만 있는 데로만 모이지요?

 

  윤직원 영감은 허리에 찬 풍안집에서 풍안을 꺼내더니, 그걸 코허리에다가 처억 걸치고는 그 육중한 자가용 흥신록을 뒤적거립니다.

  올챙이는 이제 일이 거진 성사가 되었대서 엔간히 마음이 뇌는지 담배를 피워 물고 앉아서는 하회를 기다립니다.

  윤직원 영감은 만창상회의 강무엇이를 찾아내어 대강 입구구를 따져 본 결과, 빚이 더러 있기는 해도 아직 칠팔천 원은 말고 이삼만 원쯤은 돌려 주어도 한 달 기간에 낭패가 생기지는 않을 만큼 저엉정한 걸 알았습니다.

 

    "거 원, 우선 내가 뵈기는 괜찮얼 상부르네마는……."

 

  윤직원 영감은 이쯤 반승낙을 하고는, 장부를 도로 벽장에다가 건사하고, 풍안을 코끝에서 떼어 내고, 그러고서 담뱃대를 집어 물면서 자리에 앉습니다. 아까 먼젓번에 한 승낙은, 말은 없어도 신용조사에 낙방이 안 돼야만 돈을 준다는 얼수락이요, 이번 것이 진짜 승낙한 보람이 날 승낙이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이러하네마는 하고, 그 '마는'이 붙었으니 온승낙이 아니고 반승낙인 것입니다. 대복이가 없으니까 그와 다시 한번 상의를 할 요랑이지요. 그래서 혹시 대복이가 불가하다고 한다든지 하면, 말로만 반승낙을 했지 무슨 계약서라도 쓴 게 아니고 한즉, 이편 마음대로 자빠져 버리면 고만일 테니까요.

 

    "그러면……."

 

  올챙이는 윤직원 영감의 그 마는이라는 말끝을 덮어 씌우노라고 다시금 다지려 듭니다.

 

    "……내일 은행 시간 안으루는 실수 없겠죠?"

    "글씨, 우선은 그러기루 히여 두지."

    "그래서야 어디 저편이 안심을 하나요? 영감이 주장이시니깐, 영감이 아주 귀정을 지어서 말씀을 해주셔야 저 사람두 맘놓구 있지요!"

    "그렇기두 허지만, 실상 이 사람아, 자네두 늘 두구 보지만, 내사 무얼 아넝가……? 대복이가 다아 알어서 이러라구 허먼 이러구, 저러라구 허먼 저러구 허지. 괜시리 속두 잘 모르구서 돈 그까짓것 일천 오십 원 띨어 먹을라다가, 웬걸, 일천오십 원이나마 나 혼자 죄다 먹간디? 자네 구문 백오 원 주구 나먼, 천 원두 채 못 되넝 것, 그것 먹자구, 잘못허다가 내 생돈 육천 원 업어다 난장맞히게?"

    "글쎄 영감! 자리가 부실한 자리면 지가 애초에 새에 들질 않는답니다. 그새 사오 년지간이나 두구 보시구서두 그리십니까? 언제 머 지가 천거한 자리루 동전 한푼 허실한 일이 있습니까?"

   "아는 질두 물어서 가랬다네. 눈뜨구서 남의 눈 빼먹넌 세상인 종 자네두 알먼서 그러넝가?"

    "허허허허, 영감은 참 만년 가두 실수라구는 없으시겠습니다! 다아 그렇게 전후를 꼭꼭 재가면서 일을 하셔야 실수가 없긴 하지요…… 그럼 아무튼지 대복이가 오늘루 오긴 오죠?"

    "늦더래두 올 것이네."

    "그럼, 대복이만 가한 양으루 말씀하면 돈은 내일루 실수 없으시죠?"

    "그럴 티지."

    "그러면 아무려나 내일 오정 때쯤 해서 당자 강씰 데리구 오지요…… 좌우간 그만해두 한시름 놓았습니다, 허허……."

    "자네넌 시언헌가 부네마넌, 나넌 돈 천이나 더 먹을 걸 못 먹은 것 같이서 섭섭허네!"

    "허허허허, 그럼 이 댐에나 들무읏한 걸 한 자리 해오지요…… 가만히 계십시오. 수두룩합니다. 은행에서 돈을 아니 내주기 때문에 거얼걸들 합니다. 제일 죽어나는 게 은행돈 빚 얻어다가는 땅장수니 집장수니 하던 치들인데, 머 일보 사오십 전이라두 못 써서 쩔맵니다!"

    "이 판으 누가 일보 오십 전 받구 빚을 준다덩가? 소불하 일 원은 받어야지…… 주넌 놈이 아순가? 쓰넌 놈이 아수닝개로 그거라두 걷어 쓰지……."

 

  윤직원 영감은 요새 새로 발령된 폭리 취체 속을 도무지 모릅니다. 그러나 안다고 하더라도 이미 십 년 전부터 벌써 법이 금하는 고패를 넘어서 해먹는 돈장사니까, 시방 새삼스럽게 폭리 취체쯤 무서울 것도 없으려니와, 좀 까다롭겠으면 다 달리 이러쿵저러쿵 하는 수가 얼마든지 있은즉 만날 떵그렁입니다.

 

    "그러면 그 일은 그렇게 허기루 허구……."

 

  올챙이는 볼일 다 보았으니 선뜻 일어설 것이로되, 그러나 두고두고 뒷일을 좋도록 하자면, 이런 기회에 듬씬 보비위를 해야 하는 것인 줄을 자알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정녕 저녁 진질 아니 잡수셨습니까?"

    "먹다가 말었네! 속상히여서……."

 

  윤직원 영감은 그새 잊었던 화가 그 시장기로 해서 새 채비로 비어지던 것이고, 그래 재털이에 담배 터는 소리도 절로 모집니다.

 

    "거 원, 그래서 어떡허십니까! 더구나 연만하신 노인이!"

    "그러닝개 그게 다아 팔자라네!"

 

또 역정을 낼 줄 알았더니, 그런 게 아니고 방금, 아무 근심기 없던 얼굴이 졸지에 해질 무렵같이 흐려들면서 음성은 풀기 없이 가라앉습니다.

 

    "……내가 이 사람아, 나락으루 해마닥 만 석을 추수를 받구, 돈으루두 ꅙ만 원씩을 차구 앉었넌 사람인디, 아 그런 부자루 앉어서 글씨, 가끔 이렇기 끄니를 굶네그려! 으응?"

 

  과연 일년 추수하는 쌀만 가지고도 밥을 해먹자면 백년 천년을 배불리 먹고도 남을 테면서, 그러나 이렇게 배고픈 때가 있으니, 곰곰이 생각을 하면 한심하여 팔자 탄식이 나오기도 할 겝니다.

 

    "……여보게 이 사람아……! 아 자네버텀두 날더러 팔자 좋다구 그러지? 그렇지만 이 사람아, 팔자가 존 게 다아 무엇잉가! 속 모르구서 괜시리 허넌 소리지…… 그저 날 같언 사람은 말이네, 그저 도둑놈이 노적(露積)가리 짊어져 가까 버서, 밤새두룩 짖구 댕기는 개, 개 신세여! 허릴없이 개 신세여!"

 

  윤직원 영감은 잠잠히 말을 그치고, 담배 연기째 후르르 한숨을 내쉬면서, 어디라 없이 한눈을 팝니다.

  거상에 짜증난 얼굴이 아니면, 불콰하니 마음 편안한 얼굴, 호리를 다투는 뜩뜩한 얼굴이 아니면, 남을 꼬집어뜯는 전접스런 얼굴, 그러한 낯꽃만 하고 지내는 이 영감한테 이렇듯 추레하니 침통한 기색이 드러날 적이 있다는 것은 자못 심외라 않을 수 없습니다.

  돈을 흥정하는 저자에서 오고 가고 하는 속한일 뿐이지, 올챙이로서야 어디 그러한 방면으로 들어서야 제법 깊은 인정의 기미를 통찰할 재목이 되나요. 그저 백만금의 재물을 쌓아 놓고 자손 번창하겠다, 수명장수, 아직도 젊은 놈 여대치게 저엉정하겠다, 이런 천하에 드문 호팔자를 누리면서도, 근천이 질질 흐르게시리 밥을 굶네, 속이 상하네, 개 신세네, 하고 풀 죽은 기색으로 탄식을 하는 게, 이놈의 영감이 그만큼 살고 쉬이 죽으려고 청승을 떠는가 싶어 얼굴이 다시금 쳐다보일 따름이었습니다

 

 

[7권 쇠가 쇠를 낳고]  끝

[8권 상평통보서 푼과......] 다음 


* 들뭇들뭇하다 : '들썩들썩하다'의 비표준어

* 상고(商價) : 장사하는사람

* 가산(家産) : 한집안의 재산

* 흥신내보(興信內報): ?

* 암만 : 정도가 매우 심하게, 비록 그렇다 하더라도

* 수형(手形) : '어음'의 전 용어

* 불문곡직(不問曲直): 옳고 그름을 따지지 않음

* 이문(利文) : 이자

* 목족(睦族): 동족 혹은 친족끼리 화목하게 지냄

* 풍안(風眼) : 바람과 티끌을 막으려고 쓰는 안경

* 코허리 : 콧등의 잘록한 부분

* 하회(下回) : 윗사람이 회답을 내림

* 얼수락 : 어중간한 수락

* 한시름 : 큰 근심 혹은 걱정

* 소불하(少不下) : 적어도

* 취체(取締) : 규칙, 법령, 명령 따위를 지키도록 통제함.

* 고패 : 깃대 따위의 높은 기나 물건을 달아 올리고 내리기 위한 줄을 걸치는 작은 바퀴나 고리

* 듬씬 : 듬쁙(?) 넘칠 정도로 매우 가득하거나 수북한 모양

* 보비위 : 남의 비위를 잘 맞추어 줌 또는 그런 비위

* 채비 : 어떤 일이 되기 위하여 필요한 물건, 혹은 자세가 갖추어짐

* 노적가리 : 한데(한곳)에 수북이 쌓아 둔 곡식 더미

* 호리 : 매우 적은 분량

* 전접스럽다 : (사람이나 그 말, 행동이) 치사하고 더러운 데가 있다

* 낯꽃 : 감정의 변화에 따라 얼굴에 들어나는 표시

* 추레하다 : 겉 모양이 깨끗하지 못하고 생기가 없다. 태도 따위가 너절하고 고상하지 못하다

* 심외 : 생각지도 않음 혹은 그런 일

* 저자 : 시장

* 여대치다 : 능력이나 수준 등에서 훨씬 넘어서다

* 근척 : 가까운 친척

* 청승 : 긍상스럽고 처량하여 보기에 언짢은 태도나 행동


※ 송도말년 : 고려 말

※ 을축갑자 : 육십갑자 순서에서 '갑자' 다음에 '을축'이 오게 되는데 반대로 을축이 먼저 왔다는 뜻으로 무슨 일이 제대로 되지 않고 뒤바뀌고 어그러진 상태를 이르는 말

※ 쇠가 쇠를 먹다 : 동일 혈통의 무리가 서로 다투는 것을 이르는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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