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우리글 읽기/채만식-태평천하

채만식 '태평천하' 39 - 올챙이는, 윤직원 영감이......

by 구름은 자유롭다 2025. 4. 5.
반응형

8. 상평통보서 푼과......

 

  올챙이는, 윤직원 영감이 자기가 자청해서 자기 입으로 개라고 하니, 차라리 그렇거들랑 어디 컹컹 한바탕 짖어 보라고 놀리기나 하고 싶습니다. 그렇지만 그런 버릇없는 농담을 할 법이야 있습니까. 속은 어디로 갔든 좋은 말로다 자손이 번창하고 가운이 융성하게 되면, 집안 어른 된 이로는 그런 근심 저런 걱정 노상 아니 할 수도 없는 것인즉, 그걸 가지고 과히 상심할 게 없느니라고 위로를 해줍니다.

 

    "아, 여보소?"

 

  윤직원 영감은 남이 애써 위로해 주는 소리는 귀로 듣는지 코로 맡는지 종시 우두커니 한눈을 팔고 앉았다가, 갑자기 긴한 으로 고개를 내밀면서,

 

    "……자네, 사람 죽었을 때 염(殮)허넝 것 더러 부았넝가?"

 

하고 묻습니다. 자기 딴에는 따로이 속내평이 있어서 하는 소리겠지만, 이건 느닷없이 송장 일곱 매 묶는 이야기가 불쑥 나오는 데는, 등이 서늘하고 그다지 긴치 않기도 했을 것입니다.

 

    "더러 부았으리…… 그런데 말이네……."

 

  윤직원 영감은 올챙이가 이렇다저렇다 얼른 대답을 못 하고 우물우물하는 것을 상관 않고 자기가 그 뒤를 잇습니다.

 

    "……아, 우리 마니래(마누라)가 작년 정월이 죽잖있넝가?"

    "네에! 아 참, 벌써 그게 작년 정월입니다그려! 세월이 빠르긴 허군!"

    "게, 그때, 수험을 헌다구 날더러두 들오라구 허기에, 시쳇방으를 들어가잖있덩가. 들어가서 가만히 보구 섰으닝개, 수의를 죄다 갈어 입히구 나서넌 일곱 매를 묶기 전에, 어따 그놈의 것을 무어라구 허데마는…… 쌀 한 숟가락을 떠서 맹인 입으다가 놓는 체허면서 천 석이요오 허구, 두 숟가락 떠느먼서 이천 석이요오 허구, 세 숟가락 떠느먼서 삼천 석이요오 허구, 아 이런담 말이네……! 그러구 또, 시방은 쓰지두 않넌 옛날 돈 생평통보(常平通寶) 한 푼을 느주먼서 천 냥이요오, 두 푼 느주먼서 이천 냥이요오, 스 푼 느주먼서 삼천 냥이요오, 이러데그려!"

    "그렇지요! 그게 다아……."

 

  올챙이는 비로소 윤직원 영감의 말하고자 하는 속을 알아차렸대서 고개를 까댁까댁 맞장구를 칩니다.

 

    "……그게 맹인이 저승길 가면서 노수두 쓰구, 또 저승에 가서두 부자루 잘 지내라구 그러잖습니까?"

    "응 그리여. 글씨 그런 줄 나두 알기넌 알어. 또, 우리 어머니 아버지 때두 다아 보구 그래서, 츰으루 보덩 건 아니지. 그러닝개 츰 귀경히였다넝 게 아니라, 내 말은 그런 말이 아니구…… 아니 글씨 여보소, 우리 마니래만 히여두 명색이 만석꾼이 집 여편네가 아닝가? 만석꾼이…… 그런디 필경 두 다리 쭈욱 뻗구 죽으닝개넌 저승으루 갈라면서, 쌀 게우 세 숟가락허구, 돈 엽전 스 푼허구, 게우 고걸 각구 간담 말이네그려, 응? 만석꾼이가 죽어 저승으로 가먼서넌 쌀 세 숟가락에 엽전 스 푼을 달랑 얻어 각구 간담 말이여!"

 

  올챙이는 자못 엄숙해하는 낯으로 고즈넉이 앉아 듣고 있고, 윤직원 영감은 뻐금뻐금 한참이나 담배를 빨더니 후우 한숨을 한번 내쉬고는 말끝을 다시 잇댑니다.

 

    "게, 그걸 보구서 고옴곰 생각을 허닝개루, 나두 한번 눈을 감구 죽어지먼 벨수띴이 저렇기 쌀 세 숟가락허구 엽전 스 픈허구, 달랑 고걸 띨어 각구 저승으루 가겄거니……! 그럴 것 아닝가? 머, 나라구 무덤을 죄선만허게 파구서, 그 속으다가 나락을 수천 석 쟁여 주며, 돈을 수만 냥 딜이띠려 주겄넝가? 또오, 그런대두 아무 소용 띴넌 짓이구…… 그렇잖엉가?"

    "허허, 다아 그런 게지요!"

    "그렇지? 그러니 말이네. 아, 내 손으루 만석을 받구, 수만 원을 주물르던 나두, 죽어만지먼 별수띴이 쌀 세 숟가락허구 엽전 달랑 스 픈 얻어 각구 저승으루 갈 테먼서 말이네…… 글씨 그럴라먼서 왜 내가 시방 이 재산을 지키니라구 이대두룩 악을 쓰구, 남안티 실인심허구, 자식 손자놈덜안티 미움받구, 나 쓰구 싶은 대루, 나 지내구 싶은 대루 못 지내구 이러넝고! 응? 그 말뜻 알어들어?"

    "네―네…… 허허, 참 거……."

    "그러나마, 그러나마 말이네…… 내가 앞으루 백 년을 더 살 것잉가? 오십 년을 더 살 것잉가? 잘 히여야 한 십 년 더 살다가 두 다리 뻗을 티먼서. 그러니, 나 한번 급살맞어 죽어 뻬리먼 아무것두 모르구 다아 잊어버릴 년의 세상…… 그런디 글씨, 어쩌자구 내가 이렇기 아그려쥐구 앉아서, 돈 한푼에 버얼벌 떨구, 뭇 놈년덜 눈치 코치 다아 먹구, 늙발에 호의호식, 평안히 못 지내구…… 그것뿐잉가? 게다가 한푼이라두 더 못 뫼야서 아등아등허구…… 허니, 원 내가 이게 무슨 놈의 청승이며, 무슨 놈의 지랄 짓잉고오? 이런 생객이 가끔, 그 뒤버틈은 들더람 말이네그려!"

 

  윤직원 영감으로 앉아, 그런 마음을 먹고 이런 소리를 함부로 하다께, 올챙이의 소견이 아니라도, 이건 정말 죽으려고 마음이 변했나 봅니다

 

[8권 상평통보서 푼과......] 계속


* 자청(自請) : 어떤 일에 나서기를 스스로 청함

* 가운(家運) : 집안의 운수

* 노상 : 언제나 변함없이 한 모양으로 줄곧

* 과히 : 정도가 심하게, 지나치게

* 낯 : 눈, 코, 입 등이 있는 얼굴의 바닥, 얼굴

* 염(殮) : 죽은 사람의 몸을 수의로 갈아입힌 후 베나 이불 따위로 쌈

* 속내평 : 겉으로 드러나지 아니한 속마음이나 일의 내막

* 수험 : 수시(收屍), 시신이 굳기 전에 정성을 다하여 몸을 바로잡음

* 노수(路需) : 먼 길을 떠나 오가는 데 드는 비용

* 고즈넉이 : 말없이 다소곳하거나 잠잠하게

* 벨수띳이 : 별수없이(?)

* 급살 : 갑자기 닥쳐오는 재액, 불운

* 뒤버틈 : ? 


※상평통보(常平通寶)

조선 시대에 쓰이던 엽전(돈)의 이름. 인조 11년(1633년)부터 조선 후기까지 주조하여 사용됨.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