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 쇠가 쇠를 낳고
사랑방에는 언제 왔는지 올챙이 석서방이, 과시 올챙이같이 토옹통한 배를 안고 윗목께로 오도카니 앉아 있습니다. 시쳇말로는 브로커요, 윤직원 영감 밑에서 거간을 해먹는 사람입니다. 돈도 잡기 전에 배 먼저 나왔으니 갈데없이 근천스런 ×배요, 납작한 체격에 형적도 없는 모가지에, 다 올챙이 별명 타자고 나온 배지 별게 아닐 겝니다.
"진지 잡수셨습니까?"
올챙이는 오꼼 일어서면서 공순히, 그러나 친숙히 인사를 합니다. 윤직원 영감은 속으로야, 이 사람이 저녁에 다시 온 것이 반가울 일이 있어서 느긋하기는 해도, 짐짓,
"안 먹었으면 자네가 설넝탱이라두 한 뚝배기 사줄라간디, 밥 먹었나구 묻넝가?"
하면서 탐탁잖아하는 낯꽃으로 전접스런 소리를 합니다.
"아, 잡수시기만 하신다면야 사드리다뿐이겠습니까?"
생김새야 아무리 못생겼다 하기로서니, 남의 그런 낯꽃 하나 여새겨 볼 줄 모르며, 그런 보비위 하나 할 줄 모르고서, 몇천 원 더러는 몇만 원 거간을 서 먹노라 할 위인은 아닙니다. 옳지, 방금 큰소리가 들리더니, 정녕 안에서 무슨 일로 역정이 난 끝에 밥도 안 먹고 나오다가, 그 화풀이를 걸리는 대로 나한테 하는 속이로구나, 이렇게 단박 눈치를 채고는 선뜻 흠선을 피우면서, 마침 윤직원 영감이 발이나 넘는 장죽에 담배를 재어 무니까, 냉큼 성냥을 그어 댑니다.
"……그렇지만 어디 지가 설마한들 설렁탕이야 사드리겠어요! 참 하다못해 식교자라두 한 상……."
"체에! 시에미가 오래 살먼 구정물통으(개숫물통에) 빠져 죽넌다더니, 내가 오래 사닝개루 벨일 다아 많얼랑개비네! 인재넌 오래간만으 목구녁의 때 좀 벳기넝개비다!"
윤직원 영감 입에서는 담배 연기가 피어올라 자옥하니 연막을 치고, 올챙이는 팽팽한 양복가랑이를 펴면서 도사렸던 다리를 퍼근히 하고 저도 마코를 꺼내서 붙입니다.
"온 영감두……! 지가 영감 식교자 한 상 채려 드리기루서니 그게 그리 대단하다구, 그런 말씀을……."
"글씨 이 사람아, 말만 그렇기, 어따 저어 상말루, 줄 듯 줄 듯허먼서 안 주더라구, 말만 그렇기 허지 말구서 한 상 처억 좀 시기다 주어 보소? 늙은이 괄세넌 히여두 아덜 괄세넌 않넌다데마넌, 늙은이 대접두 더러 히여야 젊은 사람이 복을 받고 허넌 벱이네. 그렇잖엉가? 이 사람……."
윤직원 영감은 히죽이 웃기까지 하는 것이, 방금, 그다지 등등하던 기승은 그새 죄다 잊어버린 모양으로 아주 태평입니다. 워너니 그도 그래야 할 것이, 만약 그 숱해 많은 싸움을, 싸움하는 족족 오래 두고 화가 풀리지 않을래서야 사람이 지레 늙을 노릇이지요.
"아―니 머, 빈말씀이 아니라……."
올챙이는 금세 일어서서 밖으로 나갈 듯이 뒤를 들먹들먹합니다.
"……시방이라두 나가서, 무어 약주 안주나 될 걸루 좀 시켜 가지구 오지요. 전화루 시키면 곧 될 테니깐두루…… 정녕 저녁 진질 아니 잡수셨어요? 그러시다면 그 요량을 해서……."
"헤헤엣다! 참, 엎질러 절 받기라더니, 야 이 사람, 그런 허넌 첼랑 구만 히여 두소. 자네가 암만히여두 딴 요량장이 있어 각구서 시방 그러넌 속 나두 다아 알구 있네!"
"네? 딴 요량요? 원, 천만에!"
"아까 아참나잘으 와서 이얘기허던 그 조간 때미 그러지? 응?"
"아니올시다, 원……! 그건 그거구 이건 이거지, 어쩌면 절 그런 놈으루만 치질 하십니까! 허허허."
"그러구저러구 간으, 그건 아침에 말헌 대루 이화리〔二割引〕아니구넌 안 되니 그렇게 알소잉?"
윤직원 영감은 정색을 하느라고 담뱃대를 입에서 뽑고, 올챙이도 다가앉을 듯이 앉음새를 도사립니다.
"그리잖어두 허긴 그 사람 강씰 방금 또 만나구 오는 길인데요…… 그래 그 말씀두 요정을 내구 허기는 해야겠습니다마는……."
"그럼, 이화리 히여서라두 쓴다구 그러덩가?"
"그런데 거, 이번 일은 제 얼굴을 보시구서라두 좀 생각해 주서야 하겠습니다!"
"생각이라께 별것 있넝가? 돈 취히여 주넝 것이지."
"물론 주시긴 주시는데, 일 할만 해주세요!"
"건, 안 될 말이래두!"
"온, 자꾸만 그러십니다. 칠천 원짜리 삼십 일 수형에 일 할이라두, 자아, 보십시오, 선변을 제하시니깐 육천삼백 원 주시구서 한 달 만에 칠백 원을 얹어서 칠천 원으루 받으시니 그만 해두 그게 어딥니까……? 아무리 급한 돈이래두, 쓰는 사람이 생각하면 하늘이 내려볼까 무섭잖겠어요……? 그런 걸 글쎄, 이 할이나 허자시니!"
"허! 사람두……! 이 사람아, 돈이 급허면 급헐수룩 다아 요긴허구, 그만침 갭이 나갈 게 아닝가? 그러닝개루 변두 더 내구서 써야지?"
"그렇더래두 영감 말씀대루 허자면 칠천 원 액면에 오천육백 원을 쓰구서 한 달 만에 일천사백 원 이자를 갚게 되니, 돈 쓰는 사람이 억울하잖겠습니까?"
"억울허거던 안 쓰먼 구만이지……? 머, 내가 쓰시요오 쓰시요 허구 쫓아댕김서 억지루 처ꂛ긴다덩가? 그 사람 참!"
윤직원 영감은 이렇게 배부른 흥정으로 비스듬히 드러누우려고는 하지만, 올챙이의 말이 아니라도, 육천삼백 원에 한 달 이자 칠백 원이 어디라고, 이 거리를 놓치고 싶지는 않습니다. 에누리를 하는 셈이지요. 해서 이 할을 뗄 수 있으면 더할 나위 없고, 눈치 보아서 일 할 오 부로 해주어도 괜찮고, 또 저엉 무엇하면 일할이라도 그리 해롭지는 않고…… 그게 그러나마 달리 융통을 시켜야 할 자본일세 말이지, 은행의 예금장에서 녹이 슬고 있는 돈인 걸, 두고 놀리느니보담이야 이문이 아니냔 말입니다.
"영감이 무가내루 이 할만 떼신다면, 아마 그 사람두 안 쓰기 쉽습니다……."
올챙이는 역시 윤직원 영감의 배짱을 아는 터라, 마침내 이렇게 슬그머니 한번 덜미를 눌러 놓습니다. 그리고는 한참 있다가 다시,
"……그러니 자아 영감, 그러구저러구 하실 것 없이, 일 할 오 부만 하시지요…… 일 할 오 부라두 일칠은 칠, 오칠 삼십오허구, 일천오십 원입니다!"
"아―니 이 사람, 자네넌 내 밑으서 거간 서구, 내 덕으 사넌 사람이, 육장 그저 내게다가 해만 뵐라구 드넝가?"
"원 참! 그게 손해 끼쳐 디리는 게 아닙니다! 일을 다아 되두룩 마련하자니깐 그리지요. 상말루, 싸움은 말리구 흥정은 붙이라구 않습니까? 그런데 그게 남의 일이라두 모를 텐데 항차 영감의 일인 걸……."
"아따, 시방 허넌 소리가……! 야 이 사람아, 구문이 안 생겨두 자네가 시방 이러구 댕길 팅가?"
"허허, 그야…… 허허허허, 그런데 참 구문이라니 말씀이지, 저두 구문만 많이 먹기루 들자면 할이가 많은 게 좋답니다. 그렇지만 세상 일을 어디 그렇게 제 욕심대루만 할래서야 됩니까?"
"이 사람아, 그런 소리 말소. 욕심 띴이 세상 살라다가넌 제 창사구(창자) 뽑아서 남 주어야 허네!"
"것두 옳은 말씀은 옳은 말씀입니다…… 그런데 자아, 어떡허실렵니까? 제 말씀대루 일 할 오 부만 해서 주시지요? 네?"
"아이, 모르겄네! 자네 쇠견대루 허소!"
"허허허허, 진즉 그리실 걸 가지구…… 그럼 내일 당자 강씰 데리구 올 텐데, 어느만 때가 좋을는지……? 내일 은행 시간까진 돈을 써야 할 테니깐요."
"글씨…… 대복이가 와야 헐 틴디. 오늘 저녁으 온댔으닝개 오기넌 올 것이구, 오머넌 내일 아무 때라두 돈이사 주겄지만…… 자리넌 실수 띴을 자리겄다?"
"그야 지가 범연하겠습니까? 아따, 만창상점이라구, 바루 저 철물교 다리 옆입니다. 머 그 사람이 부랑자루 주색잡기하느라구 쓰는 돈이아니구, 내일 해 전으루다가 은행에 입금을 시켜야만 부도가 아니 나게 됐다는군요……! 글쎄 은행에서들 돈을 딱 가두어 놓군 돌려주질 않기 때문에, 너나 할 것 없이 모두 죽는 소립니다……! 그러나저러나 간에 이 사람 강씬 아무 염려 없구요. 다 조사해 보시면 아시겠지만……."
"내가 무얼 알겄넝가마는……."
윤직원 영감은 담뱃대를 놓고 일어서더니, 벽장 속에서 조선 백지로 맨 술 두꺼운 장부(?) 한 권을 찾아냅니다.
[7권 쇠가 쇠를 낳고] 계속
* 토옹통한 : 통통한
* 거간(居間) : 사고파는 사람 사이에 들어 흥정을 붙임 또는 그런 일을 하는 사람
* 근천스럽다 : 보잘것 없고 초라한 데가 있다.
* 형적(形跡) : 사무의 형상과 자취를 아울러 이르는 말
* 오꼼(하다) : '오뚝하다'의 전라방언
* 낯꽃 : 감정의 변화에 따라 얼굴에 드러나는 표시
* 마코 : 일제 시대의 담배
* 식교자 : 온갖 반찬과 국, 밥 따위를 차려 놓은 상
* 수형(手形) : '어음'의 이전 용어
* 선변 : 빚을 쓸 때에 본전에서 먼저 떼어 내는 이자
* 육장(六場) : 늘, 항상
* 구문(口文) : 흥정을 붙여 주고 보수로 받는 돈
* 범연하다 : 차근차근한 맛이 없이 데면데면하다. ※데면데면하다 : 사람을 대하는 태도가 친밀감이 없이 평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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