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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만식 '태평천하' 38 - 이것이 대복이의 주변으로...... 이것이 대복이의 주변으로, 종로 일대와 창안 배오개 등지와, 그 밖에 서울 장안의 들뭇들뭇한 상고들을 뽑아 신용 정도를 조사해 둔 블랙리스트입니다. 신용이라도 우리네가 보통 말하는 신용이 아니라, 가산은 통 얼마나 되는데, 갚을 빚은 얼마나 되느냐는 그 신용입니다.  이걸 만들어 놓고, 대복이는 날마다 신문이며 흥신내보(興信內報)며 또는 소식 같은 걸 참고해 가면서, 그들의 신용의 변동에 잔주〔註解〕를 달아 놓습니다.   그러니까 생기기는 아무렇게나 백지로 맨 한 권의 문서책이지만, 척 한번 떠들어만 보면, 어디서 무슨 장사를 하는 아무개는 암만까지는 돈을 주어도 좋다는 것을 휑하니 알 수가 있는 것입니다.   윤직원 영감은 시골 사람, 그 중에도 부랑자가 돈을 쓴다면 으레 매도계약까지 첨부한 부동산을 .. 2025. 3. 24.
채만식 '태평천하' 37 - 사랑방에는 언제 왔는지...... 7. 쇠가 쇠를 낳고  사랑방에는 언제 왔는지 올챙이 석서방이, 과시 올챙이같이 토옹통한 배를 안고 윗목께로 오도카니 앉아 있습니다. 시쳇말로는 브로커요, 윤직원 영감 밑에서 거간을 해먹는 사람입니다. 돈도 잡기 전에 배 먼저 나왔으니 갈데없이 근천스런 ×배요, 납작한 체격에 형적도 없는 모가지에, 다 올챙이 별명 타자고 나온 배지 별게 아닐 겝니다.     "진지 잡수셨습니까?"   올챙이는 오꼼 일어서면서 공순히, 그러나 친숙히 인사를 합니다. 윤직원 영감은 속으로야, 이 사람이 저녁에 다시 온 것이 반가울 일이 있어서 느긋하기는 해도, 짐짓,     "안 먹었으면 자네가 설넝탱이라두 한 뚝배기 사줄라간디, 밥 먹었나구 묻넝가?" 하면서 탐탁잖아하는 낯꽃으로 전접스런 소리를 합니다.     "아, 잡.. 2025. 3. 6.
채만식 '태평천하' 36 - 계집종인 삼월이는...... 계집종인 삼월이는 부엌에서 행랑어멈과 같이서 얼추 설거지를 하고 있고, 행랑아범은 안팎 아궁이를 찾아다니면서 군불을 조금씩 지피고, 그 나머지 식구들은 고씨만 빼놓고 다 안방으로 모여 저녁밥을 시작합니다.  서울아씨, 두 동서, 경손이, 태식이, 전주댁 이렇습니다. 그들은 아무도 방금 일어났던 풍파를 심려한다든가 윤직원 영감이 저녁밥을 중판멘 것을 걱정한다든가, 고씨가 밥상을 도로 쫓은 걸 민망히 여긴다든가 할 사람은 하나도 없고, 따라서 아무도 입맛이 없어 밥 생각이 안 날 사람도 없습니다.  다만, 먼저의 싸움의 입가심같이 그 다음엔 조그마한 싸움 하나가 벌어집니다. 태식이가 구경에 세마리가 팔렸다가 싸움이 끝이 나니까 다시 밥 시작을 하는데, 마침 경손이가 툭 튀어들더니, 윤직원 영감이 앉았던 자리.. 2025. 2. 4.
채만식 '태평천하' 35 - 실상 윤직원 영감은...... 실상 윤직원 영감은 저편이 싸움을 돕는 줄을 몰랐던 건 아닙니다. 다 알고서도, 어디 얼마나 하나 보자고 넌지시 늦추 잡도리를 하느라, 고씨가 처음 꽥소리를 칠 때도 손자며느리와 딸을 건너다보면서,     "저, 짝 찢을 년은 왜 또 지랄이 나서 저런다냐!" 하고 입만 삐죽거렸습니다.   서울아씨는 친정아버지를 따라 입을 삐죽거리고, 두 손자며느리는 고개를 숙이고 있다가 박씨만 조심조심 경손을 나무라느라고 마루로 나오고, 경손이가 온 줄 안 태식은 미닫이의 유리로 밖을 내다보다가 도로 오더니,     "아빠 아빠, 저 경존이 잉? 깍쟁이 자직야, 잉? 아주 옘병헐 자직이야!" 하고 떠듬떠듬 말재주를 부리고 했습니다.     "아서라! 어디서 그런……."    "잉? 아빠, 경존이 깍쟁이 자직야. 도족놈의.. 2025. 1. 19.
채만식 '태평천하' 34 - 집 안은 안방에서 윤직원 영감이...... 집 안은 안방에서 윤직원 영감이 태식을 데리고 앉아서 저녁을 먹으면서 잔소리를 씹느라고 웅얼거리는 소리, 태식이 딸그락딸그락 째금째금 하는 소리, 그 외에는 누구 하나 기침 한 번 크게 하는 사람 없고, 모두 조심을 하느라 죽은 듯 조용합니다. 바깥은 황혼이 또한 소리 없이 짙어 가고, 으슴푸레하던 방 안에는 깜박 생각이 난 듯이 전등이 반짝 켜집니다.    마침 이 전등불을 신호삼듯, 집 안의 조심스런 침정을 깨뜨리고 별안간 투덕투덕 구둣발 소리가 안중문께서 요란하더니, 경손이가 안마당으로 들어섭니다.   교복 정모에 책가방을 걸멘 것이 학교로부터 지금이야 돌아오는 길인가 본데, 이 애가 섬뻑 그렇게 들어서다 말고 대뜰에 저의 증조부의 신발이 놓인 걸 힐끔 넘겨다보더니, 고개를 움칠 혓바닥을 날름하면서.. 2025. 1. 3.
채만식 '태평천하' 33 - 고씨는 그리하여, 그처럼...... 6. 관전기(觀戰記)  고씨는 그리하여, 그처럼 오랫동안 생수절을 하고 살아오다가 마침내 단산(斷産)할 나이에 이르렀습니다. 여자 아닌 여자로 변하는 때지요. 이때를 당하면 항용의 좋은 부부생활을 해오던 여자라도 히스테리라든지 하는 이상야릇한 병증이 생기는 수가 많답니다. 그런 걸 고씨로 말하면, 이십오 년 청춘을 홀로 늙히다가, 이제 바야흐로 여자로서의 인생을 오늘 내일이면 작별하게 되었은즉, 가령 히스테리를 젖혀 놓고 보더라도 마음이 안존할 리가 없을 건 당연한 노릇이겠지요. 윤직원 영감의 걸찍한 입잣대로 하면, 오두가 나는 것도 그러므로 무리가 아닐 겝니다.   그러한데다가, 자아, 집안 살림을 맡아서 하니 그 재미를 봅니까. 자식들이라야 다 장성해서 뿔뿔이 흩어져 살고 어미는 생각도 않지요. 손자.. 2024. 12. 18.
채만식 '태평천하' 32 - 사람마다 이상한...... 사람마다 이상한 괴벽은 다 한 가지씩 있게 마련인지, 윤주사 창식도 야릇한 편성이 하나 있습니다.  그가 마음이 그렇듯 활협하고 남의 청을 거절 못 하는 인정 있는 구석이 있다는 소문을 듣고서, 어느 교육계의 명망유지 한 사람이 그의 문을 두드린 일이 있었습니다. 소간은 그 명망유지 씨가 후원을 하고 있는 사학(私學) 하나가 있는데, 근자 재정이 어렵게 되어 계제에 돈을 한 이십만 원 내는 특지가가 있으면 그 나머지는 달리 수합을 해서 재단의 기초를 완성시키겠다는 것이고, 그러니 윤주사더러 다 좋은 사업인즉 십만 원이고 이십만 원이고 내는 게 어떠냐고, 참 여러 가지 말과 구변을 다해 일장 설파를 했습니다. 윤주사는 자초지종 그러냐고, 아 그러다뿐이겠느냐고, 연해 맞장구를 쳐주어 가면서 듣고 있다가 급기.. 2024. 12.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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