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 안은 안방에서 윤직원 영감이 태식을 데리고 앉아서 저녁을 먹으면서 잔소리를 씹느라고 웅얼거리는 소리, 태식이 딸그락딸그락 째금째금 하는 소리, 그 외에는 누구 하나 기침 한 번 크게 하는 사람 없고, 모두 조심을 하느라 죽은 듯 조용합니다. 바깥은 황혼이 또한 소리 없이 짙어 가고, 으슴푸레하던 방 안에는 깜박 생각이 난 듯이 전등이 반짝 켜집니다.
마침 이 전등불을 신호삼듯, 집 안의 조심스런 침정을 깨뜨리고 별안간 투덕투덕 구둣발 소리가 안중문께서 요란하더니, 경손이가 안마당으로 들어섭니다.
교복 정모에 책가방을 걸멘 것이 학교로부터 지금이야 돌아오는 길인가 본데, 이 애가 섬뻑 그렇게 들어서다 말고 대뜰에 저의 증조부의 신발이 놓인 걸 힐끔 넘겨다보더니, 고개를 움칠 혓바닥을 날름하면서 발길을 돌려 살금살금 뒤채께로 피해 가고 있습니다. 눈에 띄었자 상 탈 일 없고, 잘못하면 사날 전에 태식을 골탕먹여 울린 죄상으로 욕이나 먹기 십상일 테라, 아예 몸조심을 하던 것입니다.
저는 아무도 안 보거니 했는데, 그러나 조모 고씨가 빤히 내다보고 있었습니다. 실상 고씨가 본댔자 영감태기한테야 혓바닥을 내미는 것말고 그보다 더한 주먹질을 해도 상관할 바 아니지만, 그러니까 그걸 가려 어쩌자는 게 아닙니다. 그 애를 통해 생트집을 잡자는 모양이지요.
"네 이놈, 경손아!"
유리쪽으로 내다보고 있던 미닫이를 냅다 벼락치듯 와르르 따악 열어 젖히면서, 집 안이 온통 떠나가게 왜장을 칩니다. 온 집안이 모두 놀란 건 물론이지만, 경손은 그만 잘겁을 했습니다. 그 애는, 증조부 윤직원 영감이 아니고 아무 상관도 없는 조모가 그렇게 내닫는 게 뜻밖이어서 더욱 놀랐습니다. 그러나 놀란 것은 순간이요 이내 침착하여 천천히 돌아서면서,
"네에?"
하고 의젓이 마주 올려다봅니다. 이편은 살기가 사뭇 뚝뚝 듣는데, 저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이 시침을 뚜욱 따고 서서 도무지 눈도 한번 깜짝 않는 양이라니, 앙똥하기 아니할말로 까죽이고 싶게 밉살머리스럽습니다.
고씨는 영영 시아버지와 싸움거리가 생기지를 않으니까, 아무고 걸리는 대로 붙잡고 큰소리를 내서 시아버지의 비위를 건드려서, 그래서 욕이 나오면 언덕이야 트집을 잡아 가지고 싸움을 하쟀던 것인데, 그놈 경손이놈이 하는 양이 우선 비위에 거슬리고 본즉, 가뜩이나 부아가 더 치밀고, 그렇지만 이판에 부아를 돋우어 주는 거리면 차라리 해롭잖을 판속입니다.
이편, 경손더러 그러나 바른 대로 말을 하라면, 집안이 제한테는 모두 어른이건만 하나도 사람 같은 건 없고, 그래서 누가 무어라고 하건 죄끔도 무섭지가 않습니다. 증조부 윤직원 영감이 그렇고, 대고모 서울아씨가 그렇고, 대부 태식이는 문제도 안 되고, 제 부친 종수나 숙모 조씨가 그렇고, 조부 윤주사의 첩들이 그렇고, 해서 열이면 아홉은 다 시쁘고 깔보이기만 합니다.
그래 시방도 속으로는, '흥! 누구 말마따나 오두가 났나? 왜 저 모양인구……? 암만 그래 보지? 내가 애먼 화풀이를 받아 주나…….' 하면서 제 염량 다 수습하고 있습니다.
고씨는 당장 무슨 거조를 낼 듯이 연하여 높은 소리로,
"네 이놈!"
하고 한번 더 을러댑니다. 그러나 이놈 이놈, 두 번이나 고함만 쳤지, 그 다음은 무어라고 나무랄 건덕지가 없습니다. 하기야 시아버지가 진짓상을 받고 계신데, 며느리 된 자 어디라고 무엄스럽게 문소리 목소리를 크게 내서 어른을 불안케 했은즉, 응당 영감태기로부터, 어허 그 며느리 대단 괘씸쿠나! 하여 필연 응전포고가 올 것이고, 그 응전포고만 오고 보면 목적한 바는 올바로 들어맞는 켯속이니 그만일 텁니다.
그러나 지금 당장은 저기 저놈 경손이놈이 사람 여남은 집어삼킨 능청맞은 얼굴을 얄밉살스럽게시리 되들고 서서, 그래 무엇이 어쨌다고 소리나 꽥꽥 지르고 저 모양인고! 할 말 있거든 해보아요? 내 참 별꼴 다 보겠네……! 이렇게 속으로 빈정대는 게 아주 번연하니, 썩 발칙스럽기도 하려니와 일변 어째 그랬든 한 번 개두를 한 이상 뒷갈무리를 못 해서야 어른의 위신과 체모가 아니던 것입니다.
"이놈, 너넌 어디 가서 무얼 허니라구 인자사 이러구 오냐?"
고씨는 겨우 꾸짖는다는 게 이겝니다. 거상에 손자놈이 학교를 잘 다니건 말건, 공부를 착실히 하건 말건, 통히 알은체도 안 해오던 터에, 오늘 밤이야 말고서 갑작스레 그런 소리를 하는 게 다 속 앗길 짓이기는 하지만, 다급한 판이니 옹색한 대로 둘러댈 수밖에 없던 것입니다.
"전람회 준비 했어요! 그러느라구 학교서 늦었어요!"
경손은 고씨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다뿍 시뻐하는 소리로 대답을 해줍니다.
그때 마침 그 애의 모친 박씨가 당황히 안방에서 나오더니 조용조용,
"너는 학교서 파하거던 일찍일찍 오지는 않구서 무슨 해망을 허느라구 이렇게 저물구…… 할머니 걱정허시게 허구, 그래!"
하고 며느리답게 시어머니를 대접하느라 아들놈을 나무랍니다.
"어머닌 또 무얼 안다구 그래요?"
경손은 버럭, 미어다부듯듯 제 모친을 지천을 하는데, 그야 물론 조모 고씨더러 배채이란 속이지요.
"……전람회 준비 때문에 학교서 늦었단밖에 어쩌라구 그래요? 왜 속두 몰라 가지구들 그래요?"
"아, 저놈이!"
"가만있어요, 어머닐랑…… 대체 집에 들앉은 부인네들이 무얼 안다구 그래요……? 내가 이 집에선 제일 어리니깐 만만헌 줄 알구, 그저 속상헌 일만 있으면 내게다가 화풀일 허려 들어! 왜 그래요? 왜……? 괜히 나인 어려두 인제 이 집안에선 매앤 어룬 될 사람이라우, 나두…… 왜 걸핏하면 날 잡두리우? 잡두리가…… 어림없이!"
한마디 거칠 것 없이, 굽힐 것 없이, 퀄퀄히 멋스려 댑니다.
"아, 이 녀석이!"
저의 모친 박씨가 목소리를 짓눌러 가면서 나무라다 못해 때려라도 주려고 달려 내려올 듯이 벼르는 것을, 그러나 경손은 본체만체 쾅당쾅당 요란스럽게 발을 구르면서 뒤꼍으로 들어갑니다.
"흥! 잘은 되야 먹는다, 이놈의 집구석……."
고씨는 차라리 어처구니가 없다고 혀를 끌끄을 차다가, 미닫이를 도로 타악 닫으면서 구느름이 나오기 시작합니다.
"……잘 되야 먹어! 이마빡으 피두 안 마른 것두 으런이 무어라구 나무래먼 천장만장 떠받구 나서기버텀 허구……! 흥! 뉘 놈의 집구석 씨알머리라구, 워너니 사람 같은 종자가 생길라더냐!"
이 쓸어 넣고 들먹거려 하는 욕이 고씨의 입으로부터 떨어지자마자, 마침내 농성(籠城)코 나지 않던 적(敵)은, 드디어 성문을 좌우로 크게 열고(가 아니라) 안방 미닫이를 벼락치듯 열어 젖히고, 일원 대장이 투구철갑에 장창을 비껴 들고(가 아니라) 성이 치달은 윤직원 영감이, 필경 싸움을 걸어 맡고 나서는 것입니다.
* 째금째금 : '조금'의 사투리. 적은 분량, 짧은 시간
* 으슴프레하다 : 희미하고 흐릿하다. 조금 어둑하고 희미하다.
* 안중문 : 안뜰로 들어가는문
* 섬뻑 : 어떤 일이 행하여진 후 곧바로
* 생트집 : 아무 까닭이 없이 트집을 잡음 또는 그 트집
* 왜장(치다) : 쓸데없이 큰 소리로 마구 떠들다
* 잘겁(하다) : 뜻밖의 일에 자지러질 정도로 깜짝 놀라다
* 앙똥하기 : 말이나 행동이 분수에 맞지 아니하게 조금 지나치다
* 비위 : 어떤 것을 좋아하거나 싫어하는 성미
* 부아 : 노엽거나 분한 마음
* 염량 : 마음을 쓰는 폭이나 도량
* 건덕지 : '건더기' 의 방언
* 켯속 : 일이 되어 가는 속사정
* 뒷갈무리 : 일의 뒤끝을 맡아서 처리함.
* 거상(居喪) : 상중
* 옹색 : 형편이 넉넉하지 못하여 생활에 필요한 것이 없거나 부족함 또는 그런 형편
* 잡두리 : 아주 요란하게 닦달하거나 족치는 일. 잘못되지 않도록 엄하게 단속하는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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