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관전기(觀戰記)
고씨는 그리하여, 그처럼 오랫동안 생수절을 하고 살아오다가 마침내 단산(斷産)할 나이에 이르렀습니다. 여자 아닌 여자로 변하는 때지요. 이때를 당하면 항용의 좋은 부부생활을 해오던 여자라도 히스테리라든지 하는 이상야릇한 병증이 생기는 수가 많답니다. 그런 걸 고씨로 말하면, 이십오 년 청춘을 홀로 늙히다가, 이제 바야흐로 여자로서의 인생을 오늘 내일이면 작별하게 되었은즉, 가령 히스테리를 젖혀 놓고 보더라도 마음이 안존할 리가 없을 건 당연한 노릇이겠지요. 윤직원 영감의 걸찍한 입잣대로 하면, 오두가 나는 것도 그러므로 무리가 아닐 겝니다.
그러한데다가, 자아, 집안 살림을 맡아서 하니 그 재미를 봅니까. 자식들이라야 다 장성해서 뿔뿔이 흩어져 살고 어미는 생각도 않지요. 손자 경손이놈은 귀엽기는커녕 까불고 앙똥해서 얄밉지요. 남편이라야 남이 아니면 원수지요. 시아버지라는 영감은 괜히 못 먹어서 으르렁으르렁하고, 걸핏하면 짝 찢을 년이네, 오두가 나서 그러네 하고 군욕질이지요. 그러니 고씨로 앉아서 당하고 보면 심술에다가 악밖에 날 게 더 있겠습니까.
그래도 작년 정월 시어머니 오씨가 살아 있을 때까지는 삼십 년 눌려서 살아온 타성으로, 고양이 앞에 쥐같이 찍소리도 못 하고 마음으로만 앓고 살았지만, 이제는 그 폭군이 하루 아침에 없고 보매 기는 탁 펴지는데, 그러나 세상은 여전히 뜻과 같지 않으니, 불평은 할 수 없이 악으로 변해 버리게만 되었던 것입니다.
시어머니가 죽고 없은 뒤로는 집안에서 어른이라면 시아버지 윤직원 영감 하나뿐이요, 그 밖에는 죄다 재하자들입니다. 한데, 그는 윤직원 영감쯤 망령난 동네 영감태기 푼수로나 보이지, 결단코 시아버지요, 위하고 어려워할 생각은 털끝만큼도 없습니다. 그러니까 그는 집안의 어른이고 아이고 간에 트집거리만 있으면 상관없이 들이대고 싸웁니다.
시방 오늘 저녁만 하더라도, 아까 쪽대문을 열어 놓았다고 윤직원 영감이 군욕질을 했대서 그 원혐으로다가 기어코 한바탕 화룡도를 내고라야 말 작정으로 그렇게 벼르고 있는 참입니다. 하기야 쪽대문을 열어 놓은 것도 실상 알고 보면, 우정 그런 것이지요. 윤직원 영감이 보고서 속 좀 상하라고. 그리고 그 끝에 무어라고 욕이나 하게 되면 싸움거리나 장만할 양으로…… 용 못 된 이무기 심술만 남더라고, 앉아서 심술이나 부려야 속이나 시원하지요.
어쨌든, 그러니 속이 후련하도록 싸움을 대판거리로 한바탕 해대야만 할 텐데, 이건 암만 도사리고 앉아 들어야 영감태기가 음충맞게시리 어린 손자며느리들더러 보리밥을 먹으면 애기 밴다는 소리나 하고 있지, 종시 이리로 대고는 무어라고 그 더러운 구습(口習)을 놀리는 것 같지가 않습니다. 그렇다고 그냥 참고 말잔즉 더 부아가 나기도 할 뿐더러, 대체 무엇이 대끼며 뉘 코 무서운 사람이 있다고, 그 부아를 참거나 조심을 할 며리도 없는 것이고 해서, 시방 두 볼이 아무튼 상말로 오뉴월 무엇처럼 추욱 처져 가지고는 숨길이 씨근버근, 코가 벌씸벌씸, 입이 삐쭉삐쭉, 깍지손으로 무르팍을 안았다 놓았다, 담배를 비벼 껐다 도로 붙였다, 사뭇 부지를 못 합니다. 미상불 사람이란 건 싸우고 싶은 때 못 싸우면 더 부아가 나는 법이니까요.
[6권 관전기] 계속
* 관전기 : 觀 볼 관, 戰 싸울 전, 記 기록할 기
* 생수절(生守節) : 남편이 죽은 것도 아닌 상태에서 하는 수절.
* 단산(斷産) : 아이를 낳던 여자가 아이를 못 낳게 됨(폐경)
* 항용(恒用) : 흔히 늘
* 히스테리 : 정신적 원인에 의하여 일시적으로 일어나는 비정상적인 흥분 상태를 통틀어 이르는 말
* 입잣 : 입놀림(좋지 않은 뜻으로)
* 오두 : 오도깨비의 준말, 괴상한 잡것이나 또는 잡귀신 ※오두가 나다 = 괴상한 잡것이나 잡귀같이 된 상태
* 군욕질 : 쓸데없는 욕질
* 종시 : 끝까지 내내
* 구습(口習) : 말버릇
* 씨근버근 : 몸집이 큰 사람이 숨이 차서 숨소리를 거칠게 내는 모양
* 벌씸벌씸 : 코 따위 탄력 있는 물체가 자꾸 크게 벌어졌다 오므라졌다 하는 모양
* 미상불 : 아닌게 아니라, 과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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