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마다 이상한 괴벽은 다 한 가지씩 있게 마련인지, 윤주사 창식도 야릇한 편성이 하나 있습니다.
그가 마음이 그렇듯 활협하고 남의 청을 거절 못 하는 인정 있는 구석이 있다는 소문을 듣고서, 어느 교육계의 명망유지 한 사람이 그의 문을 두드린 일이 있었습니다. 소간은 그 명망유지 씨가 후원을 하고 있는 사학(私學) 하나가 있는데, 근자 재정이 어렵게 되어 계제에 돈을 한 이십만 원 내는 특지가가 있으면 그 나머지는 달리 수합을 해서 재단의 기초를 완성시키겠다는 것이고, 그러니 윤주사더러 다 좋은 사업인즉 십만 원이고 이십만 원이고 내는 게 어떠냐고, 참 여러 가지 말과 구변을 다해 일장 설파를 했습니다. 윤주사는 자초지종 그러냐고, 아 그러다뿐이겠느냐고, 연해 맞장구를 쳐주어 가면서 듣고 있다가 급기야 대답할 차례에 가서는 한단 소리가,
"학교가 없어서 공부를 못 하기보다는 돈이 없어서 있는 학교도 못 다니는 사람이 많지 않습니까?"
하고 엉뚱한 반문을 하더라나요. 그래 명망유지 씨는 신명이 풀려, 두어 마디 더 이야기를 하다가 돌아갔습니다.
아닌게아니라, 윤주사는 남의 사정을 쑬쑬히 보아 주는 사람이면서도 공공사업이나 자선사업 같은 데는 죽어라고 일전 한푼 쓰지를 않습니다.
부친 윤직원 영감은 그래도 곧잘 기부는 하는 셈이지요. 시골서 살 때엔 경찰서의 무도장(武道場)을 독담으로 지어 놓았고, 소방대에다가 백 원씩 오십 원씩 두어 번이나 기부를 했고, 보통학교 학급 증설 비용으로 이백 원 내논 일이 있었고, 또 연전 경남 수재 때에는 벙어리를 새로 사다가 동전으로 일 원 칠십이 전을 넣어서 태식이를 주어서 신문사로 보내서 사진까지 신문에 난 일이 있는걸요. 그 위대한 사진 말입니다.
그러나 윤주사 창식은 도무지 그런 법이 없습니다. 영 졸리다 졸리다 못하면, 온 사람을 부친 윤직원 영감한테로 슬그머니 따보내 버릴망정 기부 같은 건 막무가내로 하지를 않습니다. 속담에, 부자라는 건 한정이 있다고 합니다. 가령 천석꾼이 부자면 천 석까지 멱이 찬 뒤엔, 또 만석꾼이 부자면 만 석까지 멱이 찬 뒤엔, 그런 뒤에는 항상 그 근처에서 오르고 내리고 하지, 껑충 뛰어넘어서 한정없이 불어 나가지는 못한다는 그 뜻입니다. 미상불 그렇습니다. 가령 윤직원 영감만 놓고 보더라도, 일년에 벼로다가 꼭 만 석을 받은 지가 벌써 십 년이 넘습니다. 그러니 그게 매년 십만 원씩 아닙니까? 또 현금을 가지고 수형장수〔手形割引業〕를 해서, 일년이면 이삼만 원씩 새끼를 칩니다. 그래서 매년 수입이 십 수만 원이니 그게 어딥니까? 가령, 세납이야 무엇이야 해서 일반 공과금과 가용을 다 쳐도 그 절반 오륙만 원이 다 못 될 겝니다. 그렇다면 그 나머지 오륙만은 해마다 처져서, 십 년 전에 만 석을 받은 백만 원짜리 부자랄 것 같으면, 십 년 후 시방은 백오십만 원의 일만 오천 석짜리 부자가 되었어야 할 게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글쎄, 그다지도 가산 늘리기에 이골이 난 윤직원 영감이건만 십 년 전에도 만석 십 년 후 시방도 만석…… 그렇습니다그려. 그렇다고 윤직원 영감이 무슨 취리에 범연해서 그랬겠습니까? 결국 아들 창식이 그런 낭비를 하고, 또 맏손자 종수가 난봉을 부리고, 군수를 목표한 관등의 승차에 관한 운동비를 쓰고 그러는 통에 재산이 그 만석에서 더 붇지를 못하고 답보로―읏을 한 거랍니다. 윤직원 영감은 가끔 창식의 그런 빚을 물어주느라고 사뭇 날뛰면서, 단박 물고라도 낼 듯이 호령 호령, 그를 잡으러 보냅니다. 그러나 창식은 부친이 한 번쯤 불러서는 냉큼 와보는 법이 없고, 세번 네번 만에야 겨우 대령을 합니다.
"야, 이 수언 잡어 뽑을 놈아, 이놈아!"
윤직원 영감은 혼자서 실컷 속을 볶다가 아들이 처억 들어와서 시침을 뚜욱 따고 앉는 양을 보면, 마구 속이 지레 터질 것 같아 냅다 욕이 먼저 쏟아져 나옵니다. 그렇다 치면 창식은 아주 점잖게,
"아버니두 무슨 말씀을 그렇게 허십니까!"
하고 되레 부친을 나무랍(?)니다.
"……아, 손자놈들이 다아 장성을 허구, 경손이놈두 전 같으면 벌써 가속을 볼 나인데, 그것들이 번연히 듣구 보구 하는 걸, 아버니는 노오 말씀을 그렇게……."
"아―니, 무엇이 어찌여?"
윤직원 영감은 그만 더 말을 못 합니다. 노상 아들한테 입 더럽게 놀린다고 핀잔을 먹은 그것을 부끄러워할 윤직원 영감이 아니건만, 어쩐 일인지 그는 아들 창식이한테만은 기를 펴지를 못합니다. 혼자서야, 이놈이 오거든 인제 어쩌구저쩌구 단단히 닦달을 하려니 하고 굉장히 벼르지요. 그렇지만 딱 마주쳐서는 첫마디에 기가 죽어 버리고 되레 꼼짝을 못 합니다.
"그놈이 호랭이나 화적보담두 더 무선 놈이라닝개! 천하 무선 놈이여!"
윤직원 영감은 늘 이렇게 아들을 무서운 놈으로 칩니다. 그러니 세상에 겁할 것이 없이 지내는 윤직원 영감을 힘으로도 아니요, 아귓심도 아니요, 총으로 아니면서 다만 압기(壓氣)로다가, 그러나마 극히 유순한 것인데, 그것 하나로다가 그저 꼼짝못하게 할 수 있는 창식은 미상불 호랑이나 화적보다 더 무서운 사람일밖에 없는 것입니다. 번번이 그렇게 윤직원 영감은 꼼짝도 못 하고서는 할 수 없이 한단 소리가,
"돈 내누아라, 이놈아……! 네 빚 물어준 돈 내누아!"
"제게 분재시켜 주실 데서 잡아 까시지요!"
창식은 종시 시치미를 떼고 앉아서 이렇게 대답을 합니다. 윤직원 영감은 그제는 아주 기가 탁 막혀서 씨근버근하다가,
"뵈기 싫다, 이 잡어 뽑을 놈아!"
하고 고함을 치고는 돌아앉아 버립니다. 이래서 결국 윤직원 영감이 지고 마는 싸움은 싸움이라도, 한 달에 많으면 두세 번 적어서 한 번쯤은 으레 싸움을 해야 합니다. 이런 빚 조건으로 생긴 싸움이, 아들 창식하고만이 아니라 맏손자 종수하고도 종종 해야 하니, 엔간히 성가실 노릇이긴 합니다. 또 그런 빚을 물어주는 싸움은 아니라도, 윤직원 영감은 가끔 딸 서울아씨와도 싸움을 해야 합니다. 작은손자며느리와도 싸움을 해야 하고, 방학에 돌아오는 작은손자 종학과도 싸움을 해야 합니다. 며느리 고씨하고는 말할 것도 없고, 사랑방에 있는 대복이나 삼남이와도 싸움을 해야 합니다. 맨 웃어른 되는 윤직원 영감이 그렇게 싸움을 줄창치듯 하는가 하면, 일변 경손이는 태식이와 싸움을 합니다. 서울아씨는 올케 고씨와 싸움을 하고, 친정 조카며느리들과 싸움을 하고, 경손이와 싸움을 하고, 태식이와 싸움을 하고, 친정아버지와 싸움을 합니다. 고씨는 시아버지와 싸움을 하고, 며느리들과 싸움을 하고, 시누이와 싸움을 하고, 다니러 오는 아들과 싸움을 하고, 동대문 밖과 관철동의 시앗집엘 가끔 쫓아가서는 들부수고 싸움을 합니다.
그래서, 싸움, 싸움, 싸움, 사뭇 이 집안은 싸움을 근저당(根抵當)해놓고 씁니다.
그리고 그런 숱한 여러 싸움 가운데 오늘은 시아버지 윤직원 영감과 며느리 고씨와의 싸움이 방금 벌어질 켯속입니다.
[5권 마음의 빈민굴] 끝
다음 [6권 관전기(觀戰記)]
* 괴벽 : 괴이한 버릇
* 편성 : 한쪽으로 치우친 성질
* 소간 : 해야할 일
* 근자 : 근래, 요사이, 최근
* 설파 : 어떤 내용을 듣는 사람이 납득하도록 분명하게 드러내어 말함
* 명망유지 : 마을이나 지역에서 명망이 있고 영향력인 있는 사람
* 계제 : 어떤 일을 할 수 있게 된 형편이나 기회
* 독담 : 혼자서 담당함
* 수형장수 : 어음 할인 ※수형(手形) : '어음'의 옛용어
* 취리 : 경제적인 이득을 얻음
* 범연 : 두드러진 데가 없이 평범
* 단박 : 당장 , 즉시,
* 아귓심 : '아귀힘' 손아귀에 잡아 쥐는 힘
* 시앗집 : 남편의 첩이 사는 집
* 켯속 : 일이 되어 가는 속사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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