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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글 읽기/채만식-태평천하

채만식 '태평천하' 30 - 이 고씨는, 말하자면 이 세상......

by 구름은 자유롭다 2024. 11.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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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고씨는, 말하자면 이 세상 며느리의 썩 좋은 견본이라고 하겠습니다.

    ---암캐 같은 시어머니, 여우나 꽁꽁 물어 가면 안방 차지도 내 차지, 곰방조대도 내 차지.

  대체 그 시어머니라는 종족이 며느리라는 종족한테 얼마나 야속스러운 생물이거드면, 이다지 박절할 속담까지 생겼습니다.

 

  열여섯 살에 시집을 온 고씨는 올해 마흔일곱이니, 작년 정월 시어머니 오씨가 죽는 날까지 꼬박 삼십일 년 동안 단단히 그 시집살이라는 걸 해왔습니다.

  사납대서 살쾡이라는 별명을 듣고, 인색하대서 진지리꼽재기라는 별명을 듣고, 잔말이 많대서 담배씨라는 별명을 듣고 하던 시어머니 오씨(그러니까 바로 윤직원 영감의 부인이지요), 그 손 밑에서 삼십일 년 동안 설운 눈물 많이 흘리고 고씨는 시집살이를 해오다가, 작년 정월에야 비로소 그 압제 밑에서 해방이 되었습니다. 남의 집 종으로 치면 속량이나 된 셈이지요.

  그러나 막상 이 고씨라는 여인이 하 그리 현부(賢婦)였더냐 하면 그런 것도 아닙니다. 하기야 아무리 흠잡을 데 없이 얌전스럽고 덕이 있고 한 며느리라도, 야속한 시어머니한테 걸리고 보면 반찬 먹은 개요, 고양이 앞에 쥐요 하지 별수가 없는 것이지만, 고씨로 말하면 사람이 몸집 생김새와 같이 둥실둥실한 게 후덕하기는 하나, 대단히 이퉁이 세어 한번 코를 휘어 붙이면 지렛대로 떠곤질러도 꿈쩍을 않고, 또 몹시 거만진 성품까지 없지 않습니다. 사상의(四象醫)더러 보라면 태음인(太陰人)이라고 하겠지요.

 

 그래 아무튼 고씨는, 그 말썽 많은 시집살이 삼십일 년을 유난히 큰 가대를 휘어잡아 가면서 그래도 쫓겨난다는 큰 파탈은 없이 오늘날까지 살아왔습니다. 그러는 동안에 종수와 종학 두 아들을 낳아서 윤직원 영감으로 하여금 군수와 경찰서장을 양성할 동량(棟梁)도 제공했고, 그리고 이제는 나이 마흔일곱에 근 오십이요, 머리가 반백에 손자 경손이가 중학교 이년급을 다니게까지 되었던 것입니다.

  그러자 계제에, 작년 정월에는 암캐 같은 시어머니였든지 테리어 같은 시어머니였든지 간에 좌우간, 그 시어머니 오씨가 여우가 꽁꽁 물어 간 것은 아니나 당뇨병으로 세상을 떠났고, 그러므로 주부의 자리가 비었은즉 제일 첫째로 며느리인 고씨가 곰방조대야, 피종을 피우는 터이니 차지를 안 해도 상관없겠지만, 안방 차지는 응당히 했어야 할 게 아니겠다구요? 장모는 사위가 곰보라도 이뻐하고, 시아버지는 며느리가 뻐드렁 이에 애꾸눈이라도 이뻐는 하는 법인데, 윤직원 영감은 어떻게 된 셈인지 며느리 고씨를 미워하기를 그의 부인 오씨 못잖게 미워했습니다. 노마나님 오씨의 초종범절을 치르고 나서, 서울아씨가 올케 되는 고씨한테 안방을 (섭섭하나마) 내줘야 하게 된 차인데 윤직원 영감이 처억 간섭을 한다는 말이, 

 

    "야―야! 너두 아다시피 내가 조석을 꼭꼭 안방으 들와서 먹넌디, 아 늬가 안방을 네 방이라구 이름지어 각구 있으 량이면 내가 편찬히여서 어디 쓰겄냐? 그러니 나 죽넌 날까지나 그냥저냥 웃방(건넌방)을 쓰구 지내라."

 

  핑계야 물론 그럴듯합니다. 그래서 안방은 노마나님 오씨의 시체만 나갔을 뿐이지 전대로 서울아씨가 태식을 데리고 거처를 하고, 고씨는 건넌방에 눌러 있게 되었던 것입니다.

 

    "흥! 만만한 년은 제 서방 굿도 못 본다더니, 나는 두 다리 뻗는 날까지 접방살이(곁방살이, 행랑살이) 못 면헐걸!"

 

  고씨는 방 때문에 비위가 상할 때면 으레 이런 구느름을 잊지 않곤 합니다. 그러나 고씨의 억울한 건 약간 안방 차지를 못 하는 것 따위만이 아닙니다. 시어머니 오씨는 마지막 숨이 지는 그 시각까지도 며느리 고씨를 못 먹어했습니다.

 

    "오―냐, 인재넌 지긋지긋허던 내가 급살맞어 죽으닝개, 시언허구 좋아서 춤출 사람 있을 것이다!"

 

  이건 물론 며느리 고씨를 물고 뜯는 말이요, 이제 자기가 죽고 나면 며느리 고씨가 집안의 안어른이 되어 가지고 마음대로 휘둘러 가면서 지낼 테라서, 그 일을 생각하면 안타깝고 밉고 하여 숨이 넘어가는 마당에서까지 그대도록 야속한 소리를 했던 것입니다.


* 곰방조대 : 대나무나 진흙 따위로 담배통을 만든 담뱃대

* 진지리꼽재기 : 진저리가 날 정도로 성질이 꼿꼿하고 자잘한 것까지 따지는 사람.

* 이퉁 : 고집

* 떠곤질르다: ---

* 사상의 : 사람의 체질을 사상(四象)-태양, 태음, 소양, 소음-으로 나누어 그 체질에 따라 치료 방법을 선택하여 쓰는 의술 또는 그 의술의 베푸는 의사

* 파탈 : 어떤 구속이나 예절로부터 벗어남

* 동량 : 기둥과 들보, 집안이나 나라를 떠받치는 중대한 일을 맡을 만한 인재

* 계제 : 어떤 일을 할 수 있게 된 형편이나 기회

* 초종범절 : 초상이 난 뒤부터 졸곡까지 치르는 모든 절차

    ※졸곡(卒哭) : 삼우제를 지낸 뒤에 곡을 끝낸다는 뜻으로 지내는 제사.

* 구느름 : 군말, 하지 않아도 좋을 쓸데없는 군더더기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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