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주 석잔이 끝난 뒤에 윤직원 영감은 비로소 금으로 봉을 박은 은숟갈을 뽑아 들고 마악 밥을 뜨려다가 문득 고개를 쳐들더니 심상찮게 두 손자며느리를 건너다봅니다.
"아―니, 야덜아……."
내는 말조가 과연 졸연찮습니다.
"……늬들, 왜 내가 시키넌 대루 않냐? 응?"
두 손자며느리는 벌써 거니를 채고서 고개를 떨어뜨립니다. 윤직원 영감은 밥이 새하얀 쌀밥인 걸 보고서, 보리를 두지 않았다고 그걸 탄하던 것입니다.
"……보리, 벌써 다아 먹었냐?"
"안직 있어요!"
맏손자며느리가 겨우 대답을 합니다.
"워너니 아직 있을 티지…… 그런디, 그러먼 왜 이렇기 맨쌀만 히여 먹냐? 응?"
조져도 아무도 대답이 없습니다.
"……그래, 내가 허넌 말은 동네 개 짖넌 소리만두 못 예기넝구나? 어찌서 보리넌 조깨씩 누아 먹으라닝개 죽여라구 안 듣구서, 이렇게 허―연 쌀만 끫어 먹으러 드냐?"
"그 궁상스런 소리 작작 허시우, 아버니두……."
서울아씨가 듣다못해 아버지를 핀잔을 주는 것입니다.
"쌀밥 좀 먹기루서니 만석꾼이 집안이 당장 망헐까 바서 그러시우? 마침 보리쌀을 삶은 게 없어서 그랬대요…… 고만두시구, 어여 진지나 잡수시우!"
"아―니, 보리쌀은 삶잖구 그냥 누아 두먼, 머 제절루 삶어진다더냐? 삶은 놈이 띴거던 다아 요량을 히여서, 미리미리 조깨씩 삶어 두구 끄니때먼 누아 먹어야지……! 그게 늬덜이 모다 호강스러서 보리밥이 멕기 싫으닝개루 핑계대넌 소리다, 핑계대넌 소리여. 공동뫼지를 가부아라? 핑계 띴넌 무덤 하나나 있데야?"
윤직원 영감은 아까운 듯이 밥을 한술 떠넣고 씹으면서, 씹으면서 생각하니 더욱 아깝던지, 또다시 뇌사립니다. 자기 자신이 부연 쌀밥만 먹기가 아깝거든, 이 아까운 쌀밥을 온 집안 식구와 심지어 종년이며 행랑것들까지 다들 먹을 것이고, 솥글겅이와 밥티가 쌀밥인 채로 수챗구멍으로 흘러 나갈 일을 생각하면, 그야 소중하고 아깝기도 했을 겝니다.
"……글씨 야덜아, 그 보리밥이랑게, 사람으 몸에 무척 좋단다. 또오, 먹기루 말허더래두 볼깡볼깡 십히넝게 맨쌀밥만 먹기보다는 훨씬 입맛이 나구…… 그런디 늬덜은 왜 그걸 안 먹으러 드냐?"
태식이가 밥을 먹느라고 째금째금 시근버근 요란을 떨 뿐이지, 아무도 대답이 없고, 두 손자며느리는 그저 지당하신 말씀이십니다고 순종하겠다는 빛을 얼굴에 드러내기에 애가 쓰입니다.
"……그러나마 늬덜더러 구찬헌 보리방애를 찌여 먹으랬을세 말이지, 아 시골서 작인덜 시키서 대껴서, 그리서 올려온 것이니, 흔헌 물으다가 북북 씻어서 있는 나무에 푹신 끫어 두구 조깨씩 누아 먹기가 그리 심이 들 게 무어람 말이냐……? 허어, 참 딱헌 노릇이다……!"
말을 잠깐 멈추더니, 그 다음엔 아주 썩 구수하게 음성도 부드럽게,
"……야덜아, 그러구 말이다, 거 보리밥이 그런 성불러두, 그걸 노―상 먹느라먼 글씨, 애기 못 낳던 여인네가 포태를 헌단다! 포태를 헌대여! 응?"
과부나 생과부가 남편이 없이 공규는 지켜도 보리밥만 노상 먹노라면 아기를 밴단 말이겠다요. 그러나, 그 말의 반응은 실로 효과 역력했습니다. 한 것이, 맏손자며느리는, 그렇다면 내일 아침부터 꼭꼭 보리밥을 먹어야 하겠다고 좋아했고, 둘째손자며느리는 아무려나 나도 먹어는 보겠다고 유념을 했고, 서울아씨는 나도 먹었으면 좋겠는데, 하는 생각을 했으니 말입니다.
다만, 이편 건넌방에서 시방 싸움을 잔뜩 벼르고 앉아 있는 며느리 고씨만은, 저 영감태기가 또 능청맞게 애들을 속여 먹는다고 안방으로 대고 눈을 흘깁니다. 참말이지 조금만 무엇했으면, 우르르 쫓아와서 그 허연 수염을 움켜쥐고 쌀쌀 들이잡아 동댕이를 쳐주고 싶게 하는 짓이 일일이 밉광머리스럽습니다.
* 반주 : 밥을 먹을 때에 곁들여서 한두 잔 마시는 술
* 졸연찮다 : 놓인 상황이 예사롭지 않다
* 솥글겅이 : 솥 바닥에 늘어붙은 밥찌끼에 물을 부어 불려서 굵은 밥
* 밥티 : 밥알
* 수챗구멍 : 수채의 허드렛물이 빠져나가는 구멍
* 볼깡볼깡 : 단단하거나 오돌오돌한 물건이 잘 씹히지 않고 입속에서 이리저리 비어져 나오는 모양
* 째금째금 : 조금씩
* 시근버근 : 몸짐이 큰 사람이 숨이 차서 숨소리를 거칠게 내는 모양
* 포태 : 아이나 새끼를 뱀
* 공규 : 오랫동안 남편이 없이 아내 혼자 지내는 방
* 밉광머리스럽다 : '밉광스럽다', 보기에 매우 밉살스러운 데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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