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상불 고씨는 어머니의 거상을 입으면서부터 기를 탁 폈습니다. 예를 들자면 드리없지만, 가령 밤늦게까지 건넌방에서 아무리 성냥 긋는 소리가 나도, 이튿날 새벽같이,
"밤새두룩 댐배질만 허니라구 성냥 열일곱 번 그신(그은) 년이 어떤 년이냐?"
하고 야단을 치는 사람이 없어, 잠 못 이루는 밤을 담배로 동무삼아 밝히기도 무척 임의로웠습니다. 또, 나들이를 한 사이에 건넌방 문에다가 못질을 해서 철갑을 하는 꼴을 안 당하게 된 것도 다 좋은 일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기만 조금 펴고 지내게 되었을 뿐이지, 실상 아무 실속도 없고 말았습니다.
시아버지 윤직원 영감이 처결하기를,
집안의 살림살이 전권(全權)이 마땅히 물려받아야 할 주부 고씨는 젖혀 놓고서, 한 대를 껑충 건너뛰어 손자대로 내려가게 했던 것입니다. 고씨의 며느리 되는 종수의 아낙인 박씨, 즉 윤직원 영감의 맏손자며느리가 시할머니의 뒤를 바로 이어서 집안의 안살림을 도맡아 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러고 보니, 묻지 않아도 내가 주부로 들어앉아 며느리를 거느리고 집안 살림을 해가는 어른이 되겠거니 했던 고씨는 그만 개밥의 도토리가 되어 버리고, 도리어 시어머니 오씨 대신에 며느리 박씨한테 또다시 시집살이(?)를 하게쯤 된 셈평이었습니다. 선왕(先王)의 뒤를 이어 즉위는 했으나 권력은 왕자가 쥐게 된 그런 판국과 같다고 할는지요.
그런데다가 시아버지 윤직원 영감은, 죽고 없는 마누라 몫까지 해서 갈수록 더 못 먹어서 으릉으릉 뜯지요. 시뉘 되는 서울아씨는, 내가 주장입네 하는 듯이 안방을 차지하고 누워서 사사이 할퀴려 들지요.
그런데, 또 더 큰 불평과 심홧거리가 있으니…….
고씨는 시방 동경엘 가서 경찰서장감으로 공부를 하고 있는 둘째아들 종학을 낳은 뒤로부터 스물네 해 이짝, 남편 윤주사 창식과 금실이 뚝 끊겨 생과부로 좋은 청춘을 늙혀 버렸습니다.
윤주사는 시골서부터 첩장가를 들어 딴살림을 했었고, 서울로 올라올 때도 그 첩을 데리고 와서 지금 동대문 밖에다가 치가를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요새는, 그새까지는 별로 않던 짓인데 새 채비로 기생첩 하나를 더 얻어서 관철동에다 살림을 차려 놓고는, 이 집으로 가서 놀다가 저 집으로 가서 누웠다 하며 지냅니다.
그리고는 본집에는 돈이나 쓸 일이 있든지, 또 부친 윤직원 영감이 두번 세번 불러야만 마지못해 오곤 하는데, 오기는 와도 사랑방에서 부친이나 만나 보고 그대로 휭나케 돌아가지, 안에는 도무지 발걸음도 않습니다.
이 윤주사라는 사람은 성미가 그의 부친 윤직원 영감과는 딴판이요, 좀 호협한 푼수로는 그의 조부 말대가리 윤용규를 닮았다고나 할는지, 그리고 살쾡이요 진지리꼽재기요 담배씨라던 그의 모친 오씨와는 더욱 딴세상 사람입니다.
도무지 철을 안 이후로 나이 마흔여섯이 되는 이날 이때까지 남과 언성을 높여 시비 한 번인들 해본 적이 없습니다. 남이 아무리 낮게 해야, 그저 그런가 보다고 모른 체할 따름이지, 마주 대고 궂은 소리라도 하는 법이 없습니다. 본시 사람이 이렇게 용하기 때문에 그를 낮아하는 사람도 별반 없지만……. 가산이고 살림 같은 것은 전혀 남의 일같이 불고하고, 또 거두잡아서 제법 살림살이를 할 줄도 모릅니다.
부친 윤직원 영감의 말대로 하면, 위인이 농판이요, 오십이 되도록 철이 들지를 않아서 세상 일이 죽이 끓는지 밥이 넘는지 통히 모르고 지내는 사람입니다. 미워서 꼬집자면 그렇게 말도 할 수가 없는 건 아니겠지요. 그러나, 또 좋게 보자면 세상 물욕(物慾)을 초탈한 사람이라고도 하겠지요. 누가 어려운 친척이나 친구가 찾아와서 아쉰 소리를 할라치면, 차마 잡아떼지를 못하고서 있는 대로 털어 줍니다. 남이 빚 얻어 쓰는 데 뒷도장 눌러 주고는 그것이 뒤집혀 집행을 맞기가 일쑵니다.
윤직원 영감은 몇 번 그런 억울한 연대채무란 것에 몇만 원 돈 손을 보던 끝에 이래서는 못쓰겠다고 윤주사를 처억 준금치산선고를 시켜 버렸습니다. 그렇지만, 그랬다고 쓸 돈 못 쓸 리는 없는 것이어서, 윤주사는 준금치산선고를 받은 다음부터는 윤두섭이라는 부친의 도장을 새겨서 쓰곤 합니다. 윤두섭의 아들 윤창식이가 찍은 도장이면 그것이 위조 도장인 줄 알고서도 몇천 원 몇만 원의 수형을 받아 주는 사람이 수두룩하고, 차용증서도 그 도장으로 통용이 되니까요. 나중에 가서 일이 뒤집어지면 윤직원 영감은 그래도 자식을 인장 위조죄로 징역은 보낼 수가 없으니까, 그런 걸 울며 겨자 먹기라든지, 할 수 없이 그 수형이면 수형, 차용증서면 차용증서를 물어 주곤 합니다.
윤주사 창식 그는 아무튼 그러한 사람으로서, 밤이고 낮이고 하는 일이라고는 쌍스럽지 않은 친구 사귀어 두고 술 먹으러 다니기, 활 쏘기, 제철 따라 승지(勝地)로 유람 다니기, 옛 한서(漢書) 모아 놓고 뒤지기, 한시(漢詩) 지어서 신문사에 투고하기, 이 첩의 집에서 술 먹다가 심심하면 저 첩의 집으로 가서 마작하기, 도무지 유유자적한 게 어떻게 보면 신선인 것처럼이나 탈속이 되어 보입니다. 물론 첩질이나 하고, 마작이나 하고, 요정으로 밤을 도와 드나드는 걸 보면 갈데없는 불량자고요
* 미상불(未嘗不) : 아니게 아니라 과연
* 거상 : 상중(喪中)
* 임의롭다 : 일정한 기준이나 원칙이 업어 하고 싶은 대로 할 수 있다.
* 심홧거리 : 심화(心火)거리, 마음속에서 북받쳐 나는 화병거리
* 호협하다 : 호방하고 의협심이 있다.
* 진지리곱재기 : 진저리가 날 정도로 성질이 꼿꼿하고 자잘한 것까지 따지는 사람. '구두쇠'의 방언(전라도 사투리)
* 농판 : 실업고 장난스러운 기미가 섞인 행동거기 혹은 그런 사람. '멍청이'의 방언(전라도)
* 준금치산 : '한정 치산'의 이전 용어,
※한정 치산 : 재산의 처분이나 관리가 법에 의하여 제한되는 상태
※한정 치산 선고 : 재산을 낭비하거나 심신이 미약하여 자신과 가족의 생활을 가난하게 만들 수 있는 자에 관하여 가정법원에서 그 행위와 능력을 제한하는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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