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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글 읽기/채만식-태평천하

채만식 '태평천하' 27 - 윤직원 영감은 그처럼......

by 구름은 자유롭다 2024. 9.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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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마음의 빈민굴

  윤직원 영감은 그처럼 부민관의 명창대회로부터 돌아와서, 대문 안에 들어서던 길로 이 분풀이, 저 화풀이를 한데 얹어 그 알뜰한 삼남이 녀석을 데리고 며느리 고씨더러, 짝 찢을 년이니 오두가 나서 그러느니 한바탕 귀먹은 욕을 걸찍하게 해주고 나서야 적이 직성이 풀려, 마침 또 시장도 한 판이라 의관을 벗고 안방으로 들어갔습니다.

 

  아랫목으로 펴놓은 돗자리 위에 방 안이 온통 그들먹하게시리 발을 개키고 앉아 있는 윤직원 영감 앞에다가, 올망졸망 사기 반상기가 그득 박힌 저녁상을 조심스레 가져다 놓는 게 둘째손자며느리 조씹니다. 방금, 경찰서장감으로 동경 가서 어느 사립대학의 법과에 다니는 종학(鍾學)의 아낙입니다.

  서울 태생이요 조대비의 서른일곱촌인지 아홉촌인지 되는 양반집 규수요, 시구문 밖이 친정이기는 하지만 배추장수 딸은 아니라도 학교라곤 근처에도 못 가보았고 얼굴은 얇디얇은 납작바탕에 주근깨가 다닥다닥 박혀서, 그닥 출 수는 없는 인물입니다. 그런 중에도 더욱 안된 건 잡아 뽑아 놓은 듯이 뚜하니 나온 위아랫입술입니다. 이 쑤욱 나온 입술로, 그 값을 하느라고 그러는지 새수빠진 소리를 그는 퍽도 잘 합니다. 새서방 종학이한테 눈의 밖에 나서 소박을 맞는 것도, 죄의 절반은 그 입술과 새수빠진 소리 잘 하는 것일 겝니다.

  종학은 동경으로 유학을 가면서부터는 아주 털어 내놓고서 이혼을 해달라고 줄창치듯 편지로 집안 어른들을 졸라 대지만, 윤직원 영감으로 앉아서 본다면 천하 불측한 놈의 소리지요.

  아무튼 그래서 생과부가 하나…….

 

  밥상 뒤를 따라 쟁반에다가 양은주전자에 술잔을 받쳐 들고 들어서는 게 맏손자며느리 박씹니다. 이 집안의 업덩어립니다. 얌전하고 바지런해서, 그 크나큰 안살림을 곧잘 휘어 나가고, 게다가 시할아버지의 보비위까지 잘 하니 더할 나위 없습니다.

  인물도 얼굴이 동그름하고 눈이 시원스럽게 생겨서, 올해 나이 서른이로되 도리어 스물다섯 살 먹은 동서보다도 젊어 보입니다. 다만 한 가지, 맏아들 경손(慶孫)이가 금년 열다섯 살인 걸, 아직도 아우를 못 보는 게 흠이라면 흠이라고 하겠지만, 하기야 손이 귀한 건 이 집안의 내림이니까요.

  한데, 이 여인 역시 신세가 고단한 편입니다. 무슨 소박이니 공방이니 하는 문자까지 가져다 붙일 것은 없어도, 남편이요 이 집안의 장손인 종수(鍾秀)가 시골로 내려가서 첩살림을 하기 때문에, 할 수 없이 생과부 축에 끼지 않을 수가 없던 것입니다.

  종수는 윤직원 영감의 가문 빛내기 위한 네 가지 사업 가운데 군수와 경찰서장을 만들어 내려는 품목 중에 편입된, 그 군수 재목입니다. 그래 오륙 년 전부터 고향의 군(郡)에서 군서기〔郡雇員〕노릇을 하느라고, 서울서 따들인 기생첩을 데리고 치가를 하는 참이랍니다.

  이래서 생과부가 둘…….

 

  맏손자며느리 박씨가 들고 들어오는 술반을 받아 가지고 윗목 화로 옆으로 다가앉아 술을 데우는 게, 윤직원 영감의 딸 서울아씨라는 진짜 과붑니다. 양반혼인을 하느라고, 서울 어느 가랭이가 찢어지게 가난한 집으로 시집을 갔다가, 새서방이 일년 만에 전차에 치여 죽어서 과부가 된 그 여인입니다.

  이마가 좁고 양미간이 넓고 콧잔등은 푹신 가라앉고, 온 얼굴에 검은 깨를 끼얹어 놓았고 목이 옴츠라지고, 이런 생김새가 아닌게아니라 청승맞게는 생겼습니다.

 

  "네가 소갈머리가 고따우루 생깄으닝개루, 저 나이에 서방을 잡어먹었지!"

 

  윤직원 영감은 딸더러 이렇게 미운 소리를 곧잘 하곤 합니다. 그러나 그런 말을 할 때면, 소갈머리뿐 아니라, 생김새도 그렇게 생겨 먹었느니라고 으레 생각을 합니다.

  젊은 과부다운 오뇌는 없지 않지만, 자라기를 호강으로 자랐고, 또 이내 포태(胞胎)도 해보지 못했기 때문에, 스물여덟이라는 제 나이보다 훨씬 앳되기는 합니다.

  이래서 생과부, 통과부 등 합하여 과부가 셋…….

 

  그러나 과부가 셋뿐인 건 아닙니다. 시방 건넌방에서 잔뜩 도사리고 앉아, 무어라고 트집거리가 생기기만 하면 시아버지 되는 윤직원 영감과 한바탕 맞다대기를 할 양으로 벼르고 있는 이 집의 맏며느리 고씨, 이 여인 또한 생과붑니다. 그리고 또 아까 안중문께로 나갔다가 마침 윤직원 영감이 삼남이 녀석을 데리고 서서 며느리 고씨더러 군욕질을 하는 걸 듣고 들어와서는, 그 말을 댓 발이나 더 잡아늘여 고씨한테 일러 바친 침모 전주댁, 이 여인이 또 진짜 과붑니다. 이래서 이 집안에 과부가 도합 다섯입니다. 도합이고 무엇이고 명색 여인네치고는 행랑어멈과 시비 사월이만 빼놓고는 죄다 과부니 계산이야 순편합니다.

 

  이렇게 생과부, 통과부, 떼과부로 과부 모를 부어 놓았으니 꽃모종이나 같았으면 춘삼월 제철을 기다려 이웃집에 갈라 주기나 하지요. 이건 모는 부어 놓고도 모종으로 갈라 줄 수도 없는 인간 모종이니 딱한 노릇입니다.


* 오두(가 나다) : 오두발광 = 몹시 흥분하여 미친 듯이 날뛰는 것 

* 걸찍하다 : 액체 따위가 묽지 않고 꽤 걸다. 또는 말 따위가 매우 푸지고 외설스럽다.

* 그들먹하다 : 일정한 범위 안에 거의 그득하다.   ※그득하다 : 일정한 범위, 한도 , 공간에 가득 찬 상태

* 개키다 : 옷이나 이부자리 따위를 겹치거나 접어서 단정하게 포개다

* 올망졸망 : 작고 또렷한 것들이 고르지 않게 많이 벌여 있는 모양. 귀엽고 엇비슷한 아이들이 많이 있는 모양

* 반상기 : 격식을 갖추어 밥상 하나를 차리도록 만든 한 벌의 그릇

                ※ -벌 : 옷이나 그릇 따위가 두개 혹은 여러 개 모여 갖추는 덩어리(set)

* 새수빠지다 : 줏대가 없고 이치에 맞지 않다.

* 보비위 : 남의 비위를 잘 맞추어 줌. 혹은 그런 비위 

                ※ 비위 : 음식물을 삭여 내거나 아니꼽고 싫은 것을 견디어 내는 성미

* 소갈머리 : '마음이나 속생각', '마음보'를 낮추어 이르는 말.

* 포태 : 임신

* 맞다대기 : 마주 대하여 혹은 서로 엇비슷하게 쌍방이 힘 있게 마주 대는 것. 또는 그런 상황

* 침모 : 남의 집에 매여 바느질을 맡아 하고 일정한 품삯을 받는 여자

* 시비 : 곁에서 시중을 드는 계집종

* 생과부 : 남편이 있으면서 멀리 떨어져 있거나 소박을 맞아서 과부나 드름없는 여자.

* 통과부 : ?

* 떼과부 : 전쟁이나 재난으로 한집안이나 마을에서 한꺼번에 생긴 과부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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