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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글 읽기/채만식-태평천하

채만식 '태평천하' 25 - 이윽고 노적과 곡간에서......

by 구름은 자유롭다 2024. 8. 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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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윽고 노적과 곡간에서 하늘을 찌를 듯 불길이 솟아오르고, 동네 사람들이 그제야 여남은 모여들어 부질없이 물을 끼얹고 하는 판에, 발가벗은 윤두꺼비가 비로소 돌아왔습니다. 화적은 물론 벌써 물러갔고요.

  윤두꺼비는 피에 물들어 참혹히 죽어 넘어진 부친의 시체를 안고 땅을 치면서,

 

    "이놈의 세상이 어느 날에 망하려느냐!"

 

통곡을 했습니다. 그리고 울음을 진정하고도 불끈 일어서 이를 부드득 갈면서,

 

    "오―냐, 우리만 빼놓고 어서 망해라!"

 

고 부르짖었습니다. 이 또한 웅장한 절규이었습니다. 아울러, 위대한 선언이었고요.

 

  윤직원 영감이 젊은 윤두꺼비 적에 겪던 경난의 한 토막이 대개 그러했습니다.

 

  그러니, 그러한 고난과 풍파 속에서 모아 마침내는 피까지 적신 재물이니, 그런 일을 생각해서라도 오늘날 윤직원 영감이 단 한푼을 쓰재도 벌벌 떠는 것도 일변 무리가 아닐 것입니다. 돈을 모으는 데 무얼 어떻게 해서 모았다는 거야 윤직원 영감으로는 상관할 바 아닙니다. 사실 착취라는 문자를 가져다가 붙이려고 하면, 윤직원 영감은 거 웬 소리냐고 훌훌 뛸 겝니다. 다 참, 내가 부지런하고 또 시운이 뻗쳐서 부자가 되었지, 작인이며 체계돈 쓴 사람이며 장리벼 얻어다 먹은 사람이며가 무슨 관계가 있느냐서 말입니다.

  바스티유 함락과는 항렬이 스스로 다르기는 하지만, 아무튼 윤직원 영감은 그처럼 육친의 피로써 물들인 재산더미 위에 올라앉아 옛날 그다지도 수난 많던 시절과는 딴판이요 도무지 태평한 이 시절을 생각하면 안심되고 만족한 웃음이 절로 솟아날 때가 많습니다.

 

  하나, 말을 타면 경마도 잡히고 싶은 게 인정이라고 합니다. 시대가 바뀌면서 소란한 세상이 지나가고 재산과 몸이 안전한 세태를 당하자, 윤두꺼비는 돈으로는 남부러울 게 없어도, 문벌이 변변찮은 게 섭섭한 걸 비로소 느끼게 되었습니다.

 

  하기야 중년에 또다시 양복청년, 혹은 권총청년이라는 것 때문에 가끔 혼띔이 나곤 하지 않은 것은 아니더랍니다.

 

  이런 일이 있었습니다.

 

  기미(己未) 경신(庚申), 바로 경신년 섣달입니다.

  논이 마침 욕심나는 게 한 오천 평 수중에 들어오게 되어서, 그 땅값을 치르려고 사천 원을 집에다가 두어 두고 땅 팔 사람이 오기를 기다리던 날입니다. 그런데 그게 귀신이 곡을 할 일이라고, 윤두꺼비는 두고두고 기막혀하였었지마는, 그걸 어떻게 염탐했는지 벌건 대낮에 쏙 빠진 양복쟁이 둘이 들이덤벼 가지고는 그 돈 사천 원을 몽땅 뺏어 가던 것입니다.

  뭐, 꿀꺽 소리 못 하고 고스란히 내다가 바쳤지요. 그 싸―늘한 쇠끝에 새까만 구멍이 똑바로 가슴패기를 겨누고서 코앞에다가 들이댄 걸, 그러니 염라대왕이 지켜 선 맥이었지요. 옛날 화적들은 밤중에나 들어와서 대문이나 짓부수고 하지요. 그 덕에 잘 하면 도망이나 할 수 있지요. 한데 이건, 바로 대낮에 귀한 손님 행차하듯이 어엿이 찾아와서는, 한다는 짓이 그 짓이니 꼼짝인들 할 수가 있었나요.

  그래, 사천 원을 도무지 허망하게 내주고는, 윤두꺼비는 망연자실해서 우두커니 한 식경이나 앉았다가, 비로소 방바닥에 떨어진 종잇장으로 눈이 갔습니다. 돈을 받았다는 영수증을 써놓고 갔던 것입니다.

 

    "허! 세상이 개명을 허닝개루 불한당놈들두 개명을 히여서 영수징 써주구 돈 뺏어 간다?"

 

  윤두꺼비는 빼앗긴 돈 사천 원이 아까워서 꼬박 이틀 동안, 그리고 세상이 또다시 옛날 화적이 횡행하던 그런 시절이나 되고 보면, 그 일을 장차 어찌하나 하는 걱정으로 꼬박 나흘 동안, 도합 엿새를 두고 밥맛과 단잠을 잃었습니다.

  그런 뒤로도 다시 두어 번이나 그런 긴찮은 손님네를 치렀습니다. 돈은 그러나 한푼도 뺏기지 않았습니다. 처음 겪은 일로 미루어 그 뒤로는 단돈 십 원도 집에다가 두어 두지를 않았으니까요.

  시골서 돈을 많이 가지고 살면, 여러 가지 공과금이야, 기부금이야, 또 가난한 일가 푸네기들한테 뜯기는 것이야, 그런 것 때문에 성가시기도 하고, 또 제일 왈, 그 양복 입은 그런 나그네가 종시 마음놓이지 않기도 하고 해서, 윤두꺼비는 마침내 가권을 거느리고 서울로 이사를 했던 것입니다.


* 통곡(痛哭) : 소리 높여 슬피 욺    ※ 痛 아플 통 / 哭 소리내어 울 곡

* 절규(絶叫) : 있는 힘을 다하여 절절하고 애타게 부르짖음    ※ 絶 끊을 절 / 叫 부르짖을 규

* 경난(經難) : 어려운 일을 겪음    ※ 經 지날 경 / 難 어려울 난

* 훌훌 : 가볍게 날듯이 뛰거나 움직이는 모양

* 체계(): 장에서 비싼 이자로 을 꾸어 주고 장날마다 본전의 일부와 이자를 받아들이던 일. 

* 장리() : 돈이나 곡식을 꾸어 주고 받을 때에는 한 해 이자로 곡식의 절반 이상을 받는 변리. 흔히 봄에 꾸어 주고 가을에 받는다. ※ 변리: 남에게 돈을 빌려 쓴 대가로 치르는 일정한 비율의 돈

* 바스티유 : 프랑스 파리 동쪽 교외에 있는 요새 & 감옥. 1789년 파리 시민이 바스티유를 습격한 사건이 프랑스 혁명의 발단이 되었다.

* 혼띔 : 단단히 혼냄. 또는 그런 일

* 섣달 : 음력으로 한 해의 맨 끝 달

* 긴찮다 : 꼭 필요하지 않다

* 가권 : 호주나 가구주에 딸린 식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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