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용규는 아주 각오를 했습니다. 행악은 어차피 당해 둔 것, 또 재물도 약간 뺏겨든 둔 것, 그렇다고 저희가 내 땅에다가 네 귀퉁이에 말뚝을 박고 전답을 떠가지는 못할 것, 그러니 저희의 청을 들어 삼천 냥을 들여서 박가를 빼놓아 주느니보다는 월등 낫겠다고, 이렇게 이해까지 따진 끝의 각오이던 것입니다.
"진정"
두목은 한번 더 힘을 주어 다집니다.
"오-냐, 날 죽이기밖으 더 헐 테야?"
"저놈 잡아 내랏!"
윤용규의 말이 미처 떨어지기 전에 두목이 뒤를 돌려다 보면서 호령을 합니다. 등뒤에 모여 섰던 수하 중에 서넛이 나가 우르르 방으로 몰려 들어 가더니 왁진왁진 윤용규를 잡아 끕니다. 그러자 마침 안채로난 뒷문이 와락 열리더니, 흰 머리채를 풀어 헤뜨린 윤용규의 노처가 아이구머니 이 일을 어쩌느냐고 울어 외치면서 달려들어 뒤엎으러져 매달립니다.
화적패들은 윤용규를 앞뒤에서 끌고 떠밀고 하고, 윤용규는 안 나가려고 버둥대면서도 그래도 할 수 없이 문께로 밀려 나옵니다. 그러다가 어찌어찌 부수대는 윤용규의 손에 총대 하나가 잡혔습니다.
총을 훌트려 쥔 그는 장독으로 고롱거리는 육십객답지 않게, 불끈 기운을 내어, 총대를 가로, 빗장 대듯 문지방에다가 밀어 대면서 발로 문턱을 디디고는 꽉 버팅깁니다. 그러고 나니까는 아무리 상투를 잡아끌고 몽둥이로 직신거리고 해도 으응 소리만 치지, 꿈쩍 않고 그대로 버팁니다. 수령이 그걸 보다 못해 옆에 섰는 수하의 몽둥이를 채어 가지고 윤용규가 총대에다가 버틴 바른편 팔을 겨누어 으끄러지라고 한번 내리칩니다. 한 것이 상거는 밭고 또 문지방이며 수하의 어깨하며 걸리적거리는 것이 많아 겨냥은 삐뚜로 나가고 말았습니다.
"따악!"
빗나간 겨냥이 옆으로 비껴 이마를 바스러지게 얻어맞은 윤용규는,
"어이쿠우"
소리와 한가지로 피를 좌르르 흘리며 털씬 주저앉았습니다. 동시에 윤용규의 노처가 그만 눈이 뒤집혀,
"아이구우, 인제는 사람까지 죽이는구나! 나두 죽여라아! 이놈들아!"
하고 외치면서 죽을 동 살 동 어느 겨를에 달려들었는지 두목의 팔을 덥씬 물고 늘어집니다.
윤용규는 주저앉은 채 정신이 아찔하다가 번쩍 깨났습니다. 그는 화적패들이 무슨 내평으로 밖으로 끌어내려고 하는지 그건 몰라도, 아무려나 이롭지 못할 것 같아 되나 안 되나 버팅겨 보았던 것인데, 한번 얻어맞고 정신이 오리소리한 판에 마침 그의 아내가 별안간,
"...... 인제는 사람까지 죽이는구나!"
하고 왜장치는 이 소리에 정말로 죽음이 박두한 줄로만 알았습니다. 그러면 인제는 옳게 이놈들의 손에 죽는구나, 그렇다면 죽어도 그냥은 안 죽는다, 이렇게 악이 복받치자, 그는 벌떡 일어서면서 눈앞에 보이는 대로 칼 하나를 채어 가지고는 마구 대고 휘저었습니다.
더욱이 눈이 뒤집히기는, 아무리 화적이라고 결단코 하지 않던 짓인데 여인을, 하물며 늙은 여인을 치는 걸 본 것입니다. 그는 그의 아내가 두목의 팔을 물고 늘어진 줄은 몰랐고 다만 두목이 아내의 머리끄덩을 잡아 동댕이를 쳐서 물린 팔을 놓치게 하는 그 광경만 보았던 것입니다.
아무리 죽자사자 악이 받쳐 칼을 휘두른다지만 죽어 가는 늙은인 걸, 십여 개나 덤비는 총개머리야 몽둥이야 칼이야 도끼야를 당해 낼 수가 없던 것입니다.
윤용규가 마지막, 목덜미를 도끼를 맞고 엎드려지자, 피를 본 두목은 두 눈이 불덩이같이 벌컥 뒤집어졌습니다. 그는 실상 윤용규를 죽일 생각은 없었습니다. 그렇다고 윤용규 하나쯤 죽이기를 차마 못 해서 그런 것은 아니고, 제 구혈로 잡아가쟀던 것입니다. 한때 만주에서 마적들이 하던 그 짓이지요. 볼모로 잡아다 두고서 가족들로 하여금 아편의 요구를 듣게 하쟀던 것입니다.
"노적(露積)허구 곡간에다가 불질러랏!"
두목은 뒤집힌 눈으로 피투성이가 되어 쓰러진 윤용규를 노려보다가 수하를 사납게 호통하던 것입니다.
* 행악(行惡) : 모질고 나쁜 짓을 행함. 또는 그런 행동
* 전답(田畓) : 논과 밭
* 호령 : 부하나 동물 따위를 지휘하여 명령함, 큰 소리로 꾸짖음.
* 노처(老妻) : 늙은 아내
* 버둥대다 : 덩치가 큰 것이 매달리거나 자빠지거나 주저앉거나 팔다리를 내저으며 자꾸 움직이다.
힘에 겨운 처지에서 벗어나려고 부득부득 애를 쓰다.
* 직신거리다 : 지그시 힘을 주어 자꾸 누르다.
* 으끄러지다 : 굳은 물건이 눌려서 부스러지다.
* 왜장치다 : 쓸데없이 큰 소리로 마구 떠들다
* 내평 : 겉으로 드러나지 아니한 속마음
* 머리끄덩이 : 머리카락을 한데 뭉친 끝
* 동댕이치다: 들어서 힘껏 내던지다.
* 노적(露積) : 곡식 따위를 한데에 수북이 쌓음, 또는 그런 물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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