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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글 읽기/채만식-태평천하

채만식 '태평천하' 28 - 밥상을 받은 윤직원 영감은......

by 구름은 자유롭다 2024. 10.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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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밥상을 받은 윤직원 영감은 방 안을 한바퀴 휘휘 둘러보더니,

 

    "태식이는 어디 갔느냐?"

 

하고 누구한테라 없이 띄워 놓고 묻습니다. 윤직원 영감이 인간 생긴 것치고 이 세상에서 제일 귀애하는 게 누구냐 하면, 시방 어디 갔느냐고 찾는 태식입니다. 지금 열다섯 살이고 나이로는 증손자 경손이와 동갑이지만, 아들은 아들입니다. 그러나 본실 소생은 아니고, 시골서 술에미〔酒女〕를 상관한 것이 그걸 하나 보았던 것입니다. 배야 뉘 배를 빌려 생겨났든 간에 환갑이 가까워서 본 막내둥이니, 아버지로 앉아서야 이뻐할 건 당연한 노릇이겠지요. 하물며 낳은 지 삼칠일 만에 어미한테서 데려다가 유모를 두고 집안의 뭇 눈치 속에서 길러 낸 천덕꾸러기니, 여느 자식보다 불쌍히 여겨서라도 한결 귀애할 게 아니겠다구요.

  윤직원 영감은 밥을 먹어도 꼭 태식이를 데리고 같이 먹곤 하는데, 오늘 저녁에는 마침 눈에 뜨이지 않으니까 숟갈을 들려고 않고서 그애를 먼저 찾던 것입니다.

 

  윗목께로 공순히 서서 있던 두 손자며느리는, 이거 또 걱정을 한바탕 단단히 들어 두었나 보다고 송구해하는 기색만 얼굴에 드러내고 있고, 그러나 딸 서울아씨는 친정아버지의 성화쯤 그다지 겁나지 않는 터라,

 

    "방금 마당에서 놀았는걸!"

 

하고 심상히 대답을 하면서 술주전자를 들고 밥상 옆으로 내려옵니다.

 

    "방금 있었넌디 어디루 갔담 말이냐? 눈에 안 뵈거덜랑 늬가 잘 동촉히여서, 찾어보구 좀, 그래야지……."

 

아니나다를까, 윤직원 영감은 딸더러 하는 소리는 소리지만, 온 집안 식구들한테다 대고 나무람을 하던 것입니다.

 

    "동촉이구 무엇이구, 제멋대루 나가 돌아다니는 걸 어떻게 일일이 참견허라구 그러시우……? 인전 나이 열다섯 살이나 먹었으니 아버니두 제발 얼뚱애기 거천허드끼 그러시지 좀 마시우!"

    "흥! 내가 그렇게라두 돌아부아 부아라……? 늬들이 작히 그걸 불쌍히 여겨서 조석이라두 제때 챙겨 멕이구 헐 듯싶으냐?"

    "아버니가 너무 역성이나 두시구, 떠받아 주시구 그러시니깐 집안 식구는 다아 믿거라구 모른 체헌다우!"

    "말은 잘 현다만, 인제 나 하나 발 뻗어 부아라? 그것이 박 박적(바가지) 들구 고샅 담박질헐 티닝개."

    "제 몫으루 천 석거리나 전장해 주실 테믄서 그러시우? 천석꾼이 거지가 되믄 오백 석거리밖엔 못 탄 년은 금시루 기절을 해 죽겠수!"

 

  서자요 병신인 태식이한테는 천 석거리를 몫지어 놓고, 서울아씨 저한테는 오백 석거리밖엔 주지 않았대서, 그걸 물고 뜯는 수작입니다. 서울아씨로는 육장 계제만 있으면 내놓는 불평이지요.

 

  이렇게 부녀가 태각태각하려고 하는 판인데, 방 윗미닫이가 사르르 열리더니 문제의 장본인 태식이가 가만히 고개를 들이밀고는 방 안을 휘휘 둘러봅니다. 그러다가 윤직원 영감의 눈에 띄니까는 들이 천동한 것처럼 우당퉁탕 뛰어들어 윤직원 영감의 커단 무릎 위에 펄씬 주저앉습니다.

  그 서슬에 서울아씨는 손에 들고 있던 술주전자를 채고서 이맛살을 찌푸리고, 윤직원 영감은 턱을 치받쳤으나 헤벌씸 웃으면서,

   

    "허허어 이 자식아, 원!"

 

하고 귀엽다고 정수리를 만져 줍니다. 아이가 사랑에 있는 상노아이놈 삼남이와 동기간이랬으면 꼭 맞게 생겼습니다. 열다섯 살이라면서, 몸뚱이는 네댓 살배기만큼도 발육이 안 되고, 그렇게 가냘픈 몸 위에 가서 깜짝 놀라게 큰 머리가 올라앉은 게 하릴없이 콩나물 형국입니다.

 

    "이 자식아, 좀 죄용죄용허지 못허구, 그게 무슨 놈의 수선이냐? 응……? 이 코! 이 코 좀 보아라……."

 

  엿가래 같은 누―런 콧줄기가 들어 가지고는 숨을 쉴 때마다 이건 바로 피스톤처럼 바쁘게 들락날락합니다.

 

    "……코가 나오거덜랑 횅 풀던지, 좀 씻어 달라구 허던지 않구서, 이게 무어란 말이냐? 응? 태식아……."

 

  윤직원 영감은 힐끔, 딸과 손자며느리들을 건너다보면서, 손수 두 손가락으로 태식의 콧가래를 잡아 뽑아 냅니다. 맏손자며느리가 재치있게 걸레를 집어 들고 옆으로 대령을 합니다.

 

    "아빠!"

 

  태식은 코를 풀리고 나서 고개를 되들고 아빠를 부릅니다.

 

    "오―냐?"

    "나, 된……."

 

  돈이란 말인데, 어리광으로 입을 가래비쌔고 말을 하니까 된이 됩니다.

 

    "돈? 돈은 또 무엇 허게? 아까 즘심때두 주었지? 그놈은 갖다가 무엇 히였간디?"

    "아탕 사먹었저."

    "밤낮 그렇게 사탕만 사먹어?"

    "나, 된 주엉!"

    "그리라…… 그렇지만 이놈은 잘 두었다가 내일 사먹어라? 응?"

    "응."

 

  윤직원 영감이 염낭에서 십 전박이 한 푼을 꺼내 주니까, 아이는 히히 하고 그의 독특한 기성을 지르면서 무릎으로부터 밥상 앞으로 내려앉습니다. 윤직원 영감은 이렇게 한바탕 막내둥이의 재롱을 보고 나서야, 서울아씨가 부어 주는 석잔 반주를 받아 마십니다. 그 동안에 태식은 씨근버근 넘싯거리면서 밥상에 있는 반찬들을 들이 손가락으로 거덤거덤 집어다 먹느라고 정신이 없습니다. 집어다 먹고는 옷에다가 손을 쓱쓱 씻고 집어 오다가 질질 흘리고 해도 서울아씨는 아버지 앞에서라 지청구는 차마 못 하고 혼자 이맛살만 찌푸립니다.


* 술에미 : 술어미의 비표준어. 술집여자, 술파는 여자

* 귀애(貴愛) : 귀엽게 여겨 사랑함.

* 동촉하다 : 통촉하다(?). 헤아려 살피다.

* 거천허드끼 : ?

* 고샅 : (시골마을) 골목 사이

* 금시루 : ?

* 육장 : 한번도 빼지 않고 늘

* 계제 : 어떤 일을 할 수 있게 된 형편이나 기회

* 태각태각 : 티격태격

* 서슬 : 강하고 날카로운 기세

* 헤벌씸 : 입 따위가 헤벌어져 벌쭉한 모양

* 정수리 : 머리 위의 솟구명이 있는 자리

* 씨근버근 : 씨근거리다 + 버근거리다.

    ※ 씨근거리다. : 고르지 아니하고 거칠고 가쁘게 숨 쉬는 소리가 자꾸 나다.

    ※ 버근거리다. : 물건의 사개가 버그러져 흔들거리다. 

* 넘싯거리다 : '넘성거리다'의 비표준어. 자꾸 넘어다보다

* 들이 : 세차게 마구

* 거덤거덤 : 덥석덥석(?)

* 지청구 : 꾸지람, 나무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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