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우리글 읽기/채만식-태평천하

채만식 '태평천하' 13 - 물론 아무리 밑질긴 거지가......

by 구름은 자유롭다 2024. 5. 12.
반응형

3. 서양국 명창대회 - 4

  물론 아무리 밑질긴 거지가 들어와서 목을 매고 늘어진댔자 동전 한푼 동냥을 주는 법은 없지만, 그러자니 졸리고 악다구니를 하고 하기가 성가신 노릇이니까요. 그러므로 만일 쪽문을 열어 놓는 것이 윤직원 영감의 눈에 뜨이고 보면, 기어코 한바탕 성화가 나고라야 마는데, 대체 식구 중에 누가 갈충머리없이 이런 해망을 부렸는지 참말 딱할 노릇입니다.

 

  역정이 난 윤직원 영감이 낙타가 바늘구멍으로 나가는 만큼이나 애를 써서 좁다란 그 쪽문으로 겨우겨우 비비 뚫고 들어서면서 꽝, 소리가 나게 문을 닫는데, 마침 상노아이놈 상남이가 그제야 뽀르르 달려 나옵니다.

  이놈이 썩 묘하게 생겼습니다. 우선 부룩송아지 대가리같이 머리가 곱슬곱슬하고 노랗기까지 한 게 장관이요. 그런 대가리가 어쩌면 그렇게도 큰지 남의 것 같습니다. 눈은 사팔이어서 얼굴을 모로 돌려야 똑바로 보이고, 코는 비가 오면 고개를 숙여야 합니다.

  나이는 스무 살인데 그것은 그것은 이 애한테만 세월이 특별히 빨리 갔는지, 열 살은 에누리 없이 모자랍니다.

 

  그러나 이 애야말로 윤직원 영감한테는 대단히 보배스러운 도구입니다. 윤직원 영감은 상노아이놈을, 똑똑한 놈을 두는 법이 없습니다. 똑똑한 놈이면 으레 훔치훔치, 즉 태을도(太乙道:도적질)를 한대서 그러는 것입니다.

 

 실상 전에 시골서 살 때에는 똑똑한 상노놈을 더러 두어 본 적도 있었으나, 했다가 번번이 그 태을도를 하는 바람에 뜨거운 영금을 보았었습니다.

 

  이 상남이는 시골 있는 산지기 자식으로, 못난 이름이 근동에 널리 떨친 것을 시험삼아 데려다가 두고 보았더니 미상불 천하일품이었습니다. 너무 멍청해서 데리고 부리기가 매우 갑갑한 때도 있기는 하지만 그 대신 일년 삼백에순날을 가도 동전 한푼은커녕 성냥 한 개비,  몰래 축내는 법이 없습니다. 또 산지기의 자식이니, 시속 아이놈들처럼 월급이니 무엇이니 하는 그런 아니꼬운 것도 달라고 않습니다. 해서 참말 둘도 구하기 어려운 보물인 것입니다.


* 악다구니 : 기를 써서 다투며 욕설을 함. 또는 그런 사람이나 행동

* 갈충머리 : 참을성이 있거나 의젓함.

* 해망: 행동이 해괴하고 요망스러움. 또는 그런 행동

* 상노 : 밥상을 나르거나 잔심부름을 하는 어린아이

* 뽀르르 : 자그마한 사람이나 짐승이 부리나케 달려가거나 쫓아가는 모양

* 부룩송아지 : 아직 길들지 아니한 송아지

* 훔치훔치 : 훔치는 행위(?)

* 영금 : 따금하게 당하는 곤욕

* 근동 : 가까운 이웃동네

* 미상불 : 아닌게 아니라 과연

* 시속 : 그 시대의 풍속, 그 당시의 속된 것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