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우리글 읽기/채만식-태평천하

채만식 '태평천하' 12 - 실상 윤직원 영감은......

by 구름은 자유롭다 2024. 5. 5.
반응형

3. 서양국 명창대회 - 3

  실상 윤직원 영감은 위정 그런 어거지를 쓴 것은 아닙니다. 꼭 극장만 여겨서 아래층이 하등인 줄 알았던 것입니다. 

 

  윤직원 영감의 처음 몇 번의 경험에 의하면 명창대회는 아래층(그러니까 하등이지요) 맨 앞자리의 맨 앞줄이 제일 좋은 자리였습니다. 기생과 광대들의 일동일정이 바로 앞에서 잘 보이고 노래가 가까이 들리고 그리고 하등이라 값이 헐하고.

 

  이러한 묘리를 터득한 윤직원 영감이라 오늘도 하등표를 산다고 사가지고 하등을 간다고 간 것이 상곱이나 더 하는 백권석이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뱃심이라고 할지 생억지라고 할지 아무튼 서두리꾼을 이겨내고 그대로 백권석에서 구경을 했습니다. 

 

 더욱 좋은 것은 여느 극장 같으면 하등인 맨 앞자리는 고놈 깍정이 같은 조무래기패가 옴닥옴닥 들어박혀 윤직원 영감의 육중한 체구가 처억 그 틈에 끼여 있을라치면 들이 놀림감이 되고 그래 좀 창피했는데, 오늘은 이 상등스러운 하등이 모두 점잖은 어른들이나 이쁜 기생들뿐이요 그따위 조무래기떼가 없어서 실로 금상첨화라 할 수 있었습니다.

 

  구경을 아주 원만히 마치고 난 윤직원 영감은 춘심이는 제 집이 청진동이니까 걸어가라고 보내고 자기 혼자만 전차 정류장까지 나왔습니다. 그러나 술해 몰려나온 구경꾼들과 같이서 전차를 탈 일이며 또 버스를 탈 일이며 그뿐 아니라 재동서 내려 경사진 계동길을 걸어 올라가자면 숨이 찰 일이며 모두 생각만 해도 대견했습니다.

 

  십 원짜리를 가지고 하면 또 공차를 탈 수도 있을 테지만, 에라 내가 돈을아껴서는 무얼 하겠느냐고 실로 하늘이 알까 무서운 변심을 먹고 마침 지나가는 인력거를 불러 탔던 것이고 결과는 돈 오 전을 가외에 더 뺏겼고 해서 정히 역정이 났었고 그리고 또 대문이 말입니다. 대문은 언제든지 꽉 잠가 두거니와 옆으로 난 쪽문도 안으로 잠겼어야 할 것이거늘 그것이 훤하게 열려 있었던 것입니다.

 

  윤직원 영감은 큰 대문을 열어 놓고 있노라면 어쩐지 집안엣것이 형적 없이 자꾸만 대문으로 해서 빠져나가는 것만 같고 그 대신 상서롭지 못한 것이 자꾸만 술술 들어오는 것만 같고 하여 간혹 장작바리나 큰집이 들어올 때가 아니면 큰대문은 결단코 열어 놓는 법이 없습니다. 이것은 아주 이 집의 엄한 가헌(?)입니다.

 

  큰 대문은 그래서 항상 봉해 두고 출입은 어른 아이 상전 하인 할 것 없이 한옆으로 뚫어 놓는 쪽문으로 드나듭니다. 그거나마 꼭꼭 지쳐 두어야지, 만일 오늘처럼 이렇게 열어 놓곤 하면 거지 등속의 반갑잖은 손님이 들어올 위험이 다분히 있습니다. 


*  위정 : 일부러

*  어거지 : 억지 

     ※억지 = 잘 안될 일을 무리하게 기어이 해내려는 고집.

*  일동일정 : 하나하나의 동작

*  헐하다 : 값이 싸다

* 묘리 : 묘한 이치

* 옴닥옴닥 : 오글오글

    ※ 오글오글 = 작은 벌레나 짐승, 사람 따위가 한곳에 빽빽하게 많이 모여 자꾸 움직이는 모양

* 금상첨화 : 비단 위에 꽃을 더한다는 뜻으로 좋은 일 위에 또 좋은 일이 더하여짐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

* 가외 : 일정한 기준이나 정도의 밖

* 역정 : 몹시 언짢거나 못마땅하여서 내는 성

* 형적 : 사물의 형상과 자취를 아울러 이르는 말

* 장작바리 : 소나 말의 등이나 수레에 장작을 가득 실은 바리

    ※ 바리 = 말이나 소의 등에 잔뜩 실은 짐. / 말이나 소의 등에 잔뜩 실은 짐을 세는 단위

* 가헌 :  한 집안의 법도나 규율

* 지쳐 두다 : 문을 잠그지 아니하고 닫아만 두다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