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서양국 명창대회 -2
윤직원 영감은 단박 분하고 괘씸하고 창피하고 뭐, 도무지 어떻다고 형언할 수가 없읍니다. 아무리 예법이 없어진 오늘이라 하더라도, 만일 그 자리가 그 자리가 아니고 계동 자기네 댁만 같았어도 이놈 당장 잡아 내리라고 호령을 한바탕 했을 겝니다.
그러나 산전수전 다 겪고 칼날 밑에서와 총부리 앞에서 목숨을 내걸어 보기 수없던 윤직원 영감입니다. 또 시속이 어떻다는 것이며, 그래 아무 데서고 함부로 잘못 호령깨나 하는 체하다가는 괜히 되잡혀서 망신을 하는 수가 있다는 것도 잘 알고 있습니다.
윤직원 영감은 속을 폭신 삭여 가지고 자기 손에 쥔 표를 내보이면서 나도 이렇게 구경을 왔노라고 점잖이 깨우쳐 주었읍니다. 그랬더니 양복신사씨는 윤직원 영감이 생각한 바와는 딴판으로 백배사죄도 않고 그저 아 그러냐고, 실례했다고, 고개만 한 번 까댁 합니다. 윤직원 영감은 그게 다시 괘씸했으나 참은 길이라 그냥 눌러 참았읍니다.
그럴 때에 마침 또 다른 양복쟁이 하나가 나타났읍니다. 윤직원 영감한테는 갖추 불길한 날입니다.
그 양복쟁이는 옷길에다가 가화(假花)를 꽂은 양이, 오늘 여기서 일 서두리를 하는 사람인가 본데, 우연히 지나가다가 윤직원 영감이 홍권을 사가지고 어엿하게 백권석에 앉아 있는 것을 발견했던 것입니다. 그는 그 붉은 입장권을 보지 못했었다면 설마 이 풍신 좋은 양반이 홍권을 가지고 백석권에 들어앉았으랴는 의심이야 내지도 않았겠지요.
"저어, 여긴 백권석입니다. 저 위칭으로 가시지요!"
양복쟁이는 좋은 말로 이렇게 간섭을 합니다. 그러나 윤직원 영감은 백권석이란 신식 문자는 모르되 이층으로 가라는 데는 자못 의외였읍니다.
"왜 날더러 그리 가라구 허우?"
"여긴 백권석인데요, 노인은 홍권을 사셨으니깐 저 위칭 홍권석으로 가셔야 합니다."
"아-니...... 이건 하등표요! 나넌 돈 오십 전 주구 하등표 이놈 샀어! 자, 보시오!"
"그러니까 말씀입니다. 노인 말씀대루 하면 여긴 상등이거든요. 그런데 노인께서 하등표 사가지구 이 상등에 앉었으니깐, 저 하등석으루 올라가시란 말씀입니다."
"예가 상등이라? 그러구 저 높은 디 이칭이 하등이라?"
"네에."
"아-니, 여보? 그래, 그런 법이 어디가 있담 말이요? 높은 디가 하등이구 나찬 상등이라니! 나넌 칠십평생으 그런 말은 츰 듣것소!"
"그래두 그렇잖습니다. 여기선 예가 상등이구 저 이칭이 하등입니다."
"거 참! 그럼, 예는 우리 죄선(朝鮮) 아니고, 저어 서양국이오? 그렇길래 이렇기 모다 꺼꾸루 되지?"
"허허허허, 그렇지만 신식은 다아 그렇답니다. 그러니 정녕 이 자리에서 구경을 허시겠거던 돈을 일 원 더 내시구 백권을 사시지요?"
"나넌 그럴 수 업소! 암만 그래두, 나넌 예가 하등이닝개루, 예서 귀경헐라우!'
우람스러운 몸집과 신선 같은 차림을 하고서 애기처럼 응석을 부리는 데는, 서두리꾼도 어리광을 받아 주는 양 짐짓 지고 말아, 윤직원 영감은 마침내 홍권으로 백권석에서 구경을 했읍니다.
* 형언(形言) : 형용하여 말함
* 호령 : 큰 소리로 꾸짖음 / 부하나 동물 따위를 지휘하여 명령함 또는 그 명령
* 서두리 : 일을 거들어 주는 사람. 또는 그러한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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