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서양국 명창대회 -1
중로에서 그렇듯 많이 충그리고 길이 터지고 했어도 회장에 당도했을 때에는 부민관 꼭대기의 큰 시계가 열두시밖에는 더 되지 않았읍니다.
입장권을 사기 전에 윤직원 영감과 춘심이 사이에는 또 한바탕 상지가 생겼읍니다.
윤직원 영감은 춘심이더러, 네 형이 출연을 한다면서 무대 뒷문으로 제 형을 찾아 들어가 공짜로 구경을 하라고 시키던 것입니다. 그러나 춘심이는, 암만 그렇더라도 저도 윤직원 영감을 따라왔고, 그래서 버젓한 손님이니까 버젓하게 표를 사가지고 들어가야 말이지, 누가 치사하게 공구경을 하느냐고 우깁니다.
그래 한참이나 서로 고집을 세우고 양보를 않던 끝에, 윤직원 영감은 슬며시 십 전박이 두 푼을 꺼내서 춘심이 손에 쥐어 주면서 살살 달랩니다.
" 옜다. 이놈으루 군밤이나 사먹구, 귀경(구경)은 공으루 들여 달라구 히여, 응......? 그렇게 허먼 너두 좋구 나두 좋구 허지?"
한여름에도 아이들한테 돈을 주려면 군밥값이라는게 윤직원 영감의 버캐뷸러리입니다.
춘심이는 군밤값 이십 전에 할 수 없이 매수가 되어 마침내 타협을 하고, 먼저 무대 뒤로 해서 들어갔읍니다.
윤직원 영감은 넌지시 오십 전을 내고 하등표를 달라고 해서, 홍권(紅券)을 한 장 샀습니다. 그래 가지고는 아래층 맨 앞자리의 맨 앞줄에 가서 천억 않으니까, 미상불 아무도 아직 들어오지 않았고, 갈데없이 첫쨉니다.
조금 앉았노라니까, 아마 윤직원 영감의 다음은 가게 날쌘 사람이었던지, 한 사십이나 되어 보이는 양복신사 하나가 비로소 들어오더니, 역시 맨 앞줄을 골라 앉습니다.
그 양복신사는 웬일인지 처음 들어오면서 윤직원 영감을 연해 흥미있게 보고 또 보고 해쌓더니, 차차로 호기심이 더하는 모양, 필경은 자리를 옮아 옆으로 바싹 와서 앉습니다. 그러고는 잠시 앉아서 윤직원 영감에게 말없는 경의를 표한다고 할까, 아무튼 몹시 이야기를 붙여 보고 싶어하는 눈치더니 마침내,
"이번에 인기가 굉장헌 모양이지요?"
하고 은근공손히 말을 청합니다. 그러나 윤직원 영감으로 보면 인기란 말이 무슨 뜻인지도 모르거니와, 또 낯모를 사람과 쓰잘데없이 이야기를 할 맛도 또한 없는 것이라 거저,
"예예!"
하고 건성으로 대답을 할 뿐입니다.
양복신사씨는 좀 싱거웠던지 잠깐 덤덤하더니 한참 만에 또,
"거 소릴 얼마나 공불허면 그렇게 명창이 되시나요?"
하고 묻는 것입니다. 윤직원 영감은 별 쑥스런 사람도 다 보겠다고 귀찮게 여기며 아무렇게나,
"글씨...... 나두 몰루."
"헤헤엣다, 괜히 그러십니다.!"
"무얼 궈녀언이 그런다구 그러우......? 나넌 소리를 좋아넌 히여두 소리를 헐 종은 모르넌 사램이요!"
"괘애니 그러세요! 명창 이동백(李東伯)씨가 노래헐 줄 모르신다면 누가 압니까?"
원 이럴 데가 있습니까! 어쩌면 윤직원 영감더러 광대 이동백이라고 하다니요!
* 충그리다 : 움직이다 말다 꾸물거리거나 머뭇거리다
* 상지(相持) : 서로 자기의 의견만을 고집하고 양보하지 아니함
* 버젓하다 : 남의 시선을 의식하여 조심하거나 굽히는 데가 없다
* 버케블러리 : Vocabulary 어휘 , 용어 , 어휘 목록
* 미상불(未嘗不) : 아닌게 아니라 과연
* 가게 : 과거
* 낯 : 눈, 코, 입 따위가 있는 얼굴의 바닥. 남을 대할 만한 체면
* 공불 : 부처에게 공양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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