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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글 읽기/채만식-태평천하

채만식 '태평천하' 7 - 기생이며 광대가......

by 구름은 자유롭다 2024. 3. 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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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무임승차기술 - 3

 

  기생이며 광대가 가지각색이요, 그래서 노래도 여러 가지려니와 직접 눈으로 보면서 오래오래 들을 수가 있기 때문에, 감질나는 라디오보다는 그것이 늘 있는 게 아니어서 흠은 흠이지만, 그때그때만은 퍽 생광스럽습니다.

 

딱히 윤직원 영감의 소원 같아서는, 그런즉슨 명창대회를 일년 두고 삼백예순날 날마다 했으면 좋을 판입니다.

 

이렇듯 천하에 달가운 명창대횐지라, 서울 장안에서 언제고 명창대회를 하게 되면 윤직원 영감은 세상없어도 참례를 합니다.

 

만일 어느 명창대회에 윤직원 영감이 참례를 못 한 적이 있다면 그것은 대복이의 태만입니다.

 

대복이는 멀리 타관에를 심부름 가고 있지 않는 이상 매일같이 골목 밖 이발소에 나가서 라디오의 프로그램과 명창대회나 조선음악연구회 주최의 공연이 있는지를 신문에서 찾아내야 합니다.

 

대복이가 만일 실수를 해서 윤직원 영감한테 그것을 알으켜 드리지 못한 결과, 혹시 한 번이라도 그 끔직한 굿(구경)에 참례를 못 하고서 을 했다는 사실을 윤직원 영감이 추후라도 알게 되는 날이면, 그때에는 대복이가 집안 가용을 지출하는 데 있어서(가령 두 모만 사야 할 두부를 세 모를 사기 때문에) 돈을 오 전 가량 요외로 더 지출했을 때만큼이나 벼락 같은 꾸중을 듣게 됩니다.

 

  아무튼 그만큼이나 좋아하는 명창대회요,

 

  그래 오늘만 하더라도 낮에는 한시부터 시작을 한다는 걸 윤직원 영감이 춘심이를 앞세우고 댁에서 나선 것이 열한시 반이 채 못 되어섭니다.

 

    "글쎄 이렇게 일찍 가서 무얼 해요? 구경터에 일찍 가서 우두커니 앉었는 것두 꼴불견인데……."

 

앞서 가던 춘심이가 일껏 잘 가다가 말고 히뜩 돌아서더니, 한참 까부느라고 이렇게 쫑알거리던 것입니다.

 

윤직원 영감은 허―연 수염을 한번 쓰다듬으면서 헤벌쭉 웃습니다.

 

    "저년이 또 초란이치름 까분다……! 그러지 말구, 어서 가자, 가아!"

 

윤직원 영감이 살살 달래니까 춘심이는 다시 돌아서서 아장아장 걸어갑니다

 

  아이가 얼굴이 남방 태생답잖게 갸로옴한 게, 또 토끼화상이 아니라도 두 눈은 또렷, 코는 오똑, 입술은 오뭇, 다 이렇게 생겨 놔서 대단히 야무집니다.

 

그렇게 야무지게 생긴 제값을 하느라고 아이가 착실히 좀 까불구요.

 

나이가 아직 열다섯 살이라, 얼굴이 피지는 않았어도 보고 듣는 게 그런 탓으로, 몸매하며 제법 계집애 꼴이 박였습니다.

 

머리를 늘쩡늘쩡 땋아 내려 자주 댕기를 드린 머리채가 방둥이에서 유난히 치렁치렁합니다.

 

그러나 이 머리는 알고 보면 중동을 몽땅 자른 단발머리에다가 다래를 드린 거랍니다.

 

앞머리는 좀 자르기도 하고 지져서 오그려 붙이기도 하고 군데군데 핀을 꽂았습니다.

 

빨아서 분홍물을 들인 흘게 빠진 생수 깨끼적삼에, 얼숭덜숭 주릿대 치마를 휘걷어 넥타이로 질끈 동인 게 또한 제격입니다.

 

살결보다는 버짐이 더 많이 피고, 배내털숭얼숭얼해서 분을 발랐다는 게 고루 먹지를 않고 어루러기가 진 것 같습니다.

 

이만하면 어디다가 내놓아도, 대광교 천변가로 숱해 많이 지나다니는 그런 모습의 동기(童妓)지, 갈데없습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깔보지는 마십시오. 그래 보여도 그 애가 요새 그 연애를 한답니다.)


* 생광스럽다 : 영광스러워 체면이 서는 듯하다.

* 참례(參禮) : 예식, 제사 전쟁 따위에 참여함

* 궐 : 마땅히 해야 할 일을 빠뜨림

* 꼴불견 : 하는 짓이나 겉모습니 차마 볼 수 없을 정도로 우습고 거슬림

* 헤벌쭉 : 입이나 구멍 따위가 속이 들여다보일 정도로 넓게 벌러진 모양

* 늘쩡늘쩡 : 느른한 태도로 느리게 쉬엄쉬엄 행동하는 모양

* 중동 : 사물의 중간이 되는 부분

* 다래 : 다래나무의 열매 

* 깨끼적삼 : 안팎 솔기를 발이 얇고 성긴 깁을 써서 곱솔로 박아 지은 적삼.

    ※ 솔기 : 옷이나 이부자리 따위를 지을 때 두 폭을 맞대고 꿰맨 줄

* 얼숭덜숭 : 회색과 검은색 등이 뒤섞여 있는 색깔을 일컫는다.

* 주릿대 치마 : (한복)치마 오른쪽 자락을 앞쪽으로 돌려 가슴에 닿을 듯이 치켜 올려 입은 뒤 허리띠를 매는 스타일

    ※ 이렇게 입으면 자연히 속바지가 노출되었은데 이 모습을 보고 사람들이 주릿대(주리를 트는 막대기)로 맞을..."이라고 했다는 데서 유래했다고 함.

* 배내털 : 배 속에서 아기가 자라날 때 돋은 털

* 숭얼숭얼 : 땀방울이나 물방울, 열매 따위가 많이 맺힌 모양

* 어루러기 : 곰팡이의 기생으로 생기는 피부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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