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서양국 명창대회 - 5
그런지라 윤직원 영감은 여느 때 같으면 삼남이가 나와서 그렇게 허리를 굽신하면, 그저 오-냐 하고 좋게 대답을 했을 것이지만, 오늘은 그래저래 역정이 난 판이라 누구든지 맨 처음에 눈에 띄는 대로 소리를 우선 버럭 질러 주어야 할 판입니다.
"야 이놈아! 어떤 손모가지가 문은 그렇기 훠어언허게 열어 누왔냐? 응?"
"저는 안 그龶어라우! 아마 중마내님이 금방 들어오꽆넌디, 그렇게 열어 누왔넝개비라우?"
중마나님이라는 건 윤직원 영감의 며느리로 지금 이 집의 형식상 주부(主婦)입니다.
" 그龶으리라! 짝 찢을 년!"
윤직원 영감은 며느리더러 이렇게 욕을 하던 것입니다. 그는 며느리뿐만 아니라, 딸이고 손자며느리고, 또 지금은 죽고 없지만 자기 부인이고, 전에 데리고 살던 첩이고, 누구한테든지 욕을 하려면 우선 그 '짝 찢을 년'이라는 서양말의 관사(冠詞) 같은 것을 붙입니다. 남잘 것 같으면 '잡어 뽑을 놈'을 붙이고......
"짝 찢을 년......! 아, 그년은 무엇하러 밤낮 그렇기 싸댕긴다냐?"
"모올라우!"
"옳다, 내가 모르넌디 늬가 알 것이냐......! 짝 찢을 년! 그년이 서방이 안 돌아부아 주닝개 오두가 나서 그러지, 오두가 나서 그리여!"
"아마 그렁개비라우!"
관중이 없어서 웃어 주질 않으니 좀 섭섭한 장면입니다.
윤직원 영감이 그렇게 쌍소리로 며느리며 누구 할 것 없이 아무한테고 욕을 하는 것은, 그의 입이 험한 탓도 있겠지만 그의 근지(根地)가 인조견이나 도금비녀처럼 허울뿐이라 그렇다고도 하겠습니다. 윤직원 영감의 근지야 참 보잘 게 별양 없습니다.
* 그래저래 : 그러하고 저러한 모양으로, 또는 그런저런 이유로
* 역정 : 몹시언짢거나 못마땅하여서 내는 성
* 손모가지 : 손, 손목을 낮잡아 부르는 말
* 관사 : 영어의 단수, 복수, 성, 격 따위를 나타내는 품사
* 오두 : 오두방정
* 근지 : 사물의 본바탕, 자라 온 환경과 경력을 아울러 이르는 말
'우리글 읽기 > 채만식-태평천하' 카테고리의 다른 글
채만식 '태평천하' 16 - 윤직원 영감(그때 당시는...... (11) | 2024.06.09 |
---|---|
채만식 '태평천하' 15 - 얼굴이 말(馬面)처럼 길대서...... (13) | 2024.06.02 |
채만식 '태평천하' 13 - 물론 아무리 밑질긴 거지가...... (65) | 2024.05.12 |
채만식 '태평천하' 12 - 실상 윤직원 영감은...... (70) | 2024.05.05 |
채만식 '태평천하' 11 - 윤직원 영감은 단박 분하고...... (75) | 2024.04.2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