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우리만 빼놓고 어서 망해라-2
윤직원 영감(그때 당시는 두꺼비같이 생겼대서 윤두꺼비로 불리어지던 윤두섭) 그는 어려서부터 취리에 눈이 밝았고 약관에는 벌서 그의 선친을 도와 가며 그 큰 살림을 곧잘 휘어 나갔습니다. 그리고 1903년 계묘년(癸卯年)부터는 고스란히 물려받은 삼천 석거리를 가지고 이래 삼십여 년 동안 착실히 가산을 늘려 왔습니다.
그래서 지금부으로부터 십여 년 전, 가권을 거느리고 서울로 이사를 해오던 그때의 집계(集計)를 보면, 벼를 실 만 석을 받았고, 요즘 와서는 현금이 십만 원 가까이 은행에 예금되어 있었습니다.
이런 걸 미루어 보면 그는 과시 승어부(勝於父)라 할 것입니다.
하기야 그 양대(兩代)가 그 어둔 시절에 그처럼 치산을 하느라고(시절이 어두우니까 체계변이며 장리변의 이문이 숫지고, 또 공문서(空文書:空土地)가 수두룩해서 가산 늘리기가 좋았던 한편으로 말입니다.) 욕심 사나운 수령(守令)한테 걸려들어 명색 없이 잡혀 갇혀서는 형장(刑杖)을 맞아 가며 토색질을 당한 것도 한두 번이 아니요. 화적(火賊)의 총부리 앞에 목숨을 내걸고 서서 재물을 약탈당하기도 부지기수요. 그러다가 말대가리 윤용규는 마침내 한패의 화적의 손에 비명의 죽음까지 한 것인즉슨 일변 생각하면 피로 낙관(落款)을 친 치산이지 녹록한 재물이라고 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윤직원 영감은 그때 일을 생각하면 시방도 가슴이 뭉클하고 그의 선친이 무참히 죽어 넘어진 시체 하며 곡식이 들이 쌓인 노적과 곡간이 불에 활활 타던 광경이 눈앞에 선연히 밟히곤 합니다.
잊히지도 않는 계묘년 삼월 보름날입니다. 이 삼월 보름날이 말대가리 윤용규의 바로 제삿날이니까요.
온종일 체계돈 받고 내주고 하기야, 춘궁에 모여드는 작인(소작인)들한테 장리벼 내주기야, 몸져 누운 부친 윤용규의 병시중 들기야 하느라고 큰살림을 맡아 처리하는 사람의 일례로 두꺼비 윤두섭 즉 젊은날의 윤직원 영감은 밤늦게야 혼곤히 들었던 잠이 옆에서 아내의 흔들며 깨우는 촉급한 속삭임 소리에 놀라 후닥닥 몸을 일으켰습니다.
한두 번도 하니요, 화적을 치르기 이미 수십 차라, 그는 잠결에도 정신이 들기 전에 육체가 먼저 위급함을 직각했던 것입니다. 장수가 전장에 나가면 진중에서는 정신은 잠을 자도 몸은 깨서 있다는 것이나 마찬가지 이치라고 할는지요.
실로 그때 당시 윤씨네 집안은 자나깨나 전전긍긍, 불안과 긴장과 경계 속에서 일시라도 몸과 마음을 늦추지 못하고 마치 살얼음을 건너가는 것처럼 위태위태 지내던 판입니다.
* 취리 : 돈이나 곡식을 빌려주고 그 변리(邊利)를 받음.
☞ 변리 : 남에게 돈을 빌려 쓴 대가로 치르는 일정한 비율의 돈.(이자)
* 가권(家眷) : 호주(戶主)나 가구주에게 딸린 식구
* 승어부 : 아버지보다 나음
* 치산(治産) : 집안 살림살이를 잘 돌보고 다스림.
* 체계변 : 에전에, 장에서 비싼 이자로 돈을 빌려 쓰고 장날마다 본전과 이자를 얼마씩 갚던 빚돈
* 장리변 : 장리로 빌려주고 이자를 받아 내는 돈놀이
☞ 장리(長利) : 돈이나 곡식을 꾸어 주고 받을 때에는 한 해 이자로 본디 곡식의 절반 이상을 받는 변리. 흔히 봄에 꾸어 주고 가을에 받는다.
* 토색질 : 돈이나 물건 따위를 억지로 달라고 하는 짓
* 낙관(落款) : 글씨나 그림 따위에 작가가 자신의 이름이나 호를 쓰고 도장을 찍는 일
* 녹록하다 : 평범하고 보잘 것 없다. 만만하고 상대하기 쉽다.
* 시방 : 말하는 바로 이때
* 춘궁(春窮) : 묵은 곡식은 다 떨어지고 햇곡식은 아직 익지 아니하여 겪는 봄철의 궁핍. (보릿고개)
* 혼곤히 : 정신이 흐릿하고 고달프게
* 전전긍긍(戰戰兢兢) : 몹시 두려워서 벌벌 떨며 조심함.
* 살얼음 : 얇게 살짝 언 얼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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