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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글 읽기/채만식-태평천하

채만식 '태평천하' 17 - 젊은 윤두꺼비는 깜깜 어둔 방 안이라도......

by 구름은 자유롭다 2024. 6.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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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우리만 빼놓고 어서 망해라-3

  젊은 윤두꺼비는 깜깜 어둔 방 안이라도 바깥의 달빛이 희유끄름한 옆문을 향해 뛰쳐나갈 자세로 고의춤을 걷어 잡으면서 몸을 엉거주춤 일으켰습니다. 보이지는 않으나 아내의 황급한 숨길이 바투 들리고 더듬어 들어오는 손끝이 바르르 떨리면서 팔에 닿습니다.

"어서! 얼른!"

 

  아내의 쥐어짜는 재촉 소리는 마침 대문을 총 개머린지 몽둥인지로 들이 쾅쾅 찧는 소리에 삼켜져 버립니다.

 

"아버님은?"

 

  윤두꺼비는 뛰쳐나가려고 꼬느었던 자세와 호흡을 잠깐 멈추고서 아내더러 물어보던 것입니다.

 

"몰라요...... 그렇지만...... 아이구 어서, 얼른!"

 

  아내가 기색할 듯이 초초한 소리로 팔을 잡아 흝는 힘이 아니라도 윤두꺼비는 벌써 몸을 날려 옆문을 박차고 나갑니다. 

 

  신발 여부도 없고 버선도 없는 맨발로, 과녁 반 바탕은 될 타작마당을 단숨에 달려, 두 길이나 높은 울타리를 문턱 넘듯 뛰어넘어, 길같이 솟은 보리밭 고랑으로 몸을 착 엎드리고 꿩 기듯 기기 시작하는 그 동안이, 아내가 흔들어 깨울 때부터 쳐서 겨우 오 분도 못 되는 순간입니다. 

 

 이렇게 윤두꺼비가 울타리를 넘어, 그러느라고 허리띠를 매지 않은 고의를 건사하지 못해서 홀라당 벗어 떨어뜨린 알몸뚱이로 보리밭 고랑에서 엎드려 기기 시작을 하자, 이제야 방금 저편 모퉁이로부터 두 그림자가 하나는 담총을 하고 하나는 몸둥이를 끌고 마침 돌아 나왔습니다.

 

  뒤 울타리로 해서 도망가는 사람을 잡으려는 파순데, 윤두꺼비한테는 아슬아슬한 순간의 찰나라 하겠습니다.

 

  그들도 도망가는 윤두꺼비를 못 보았거니와 윤두꺼비도 물론 그러한 위경이던 줄은 모르고 기기만 하던 것입니다.

 

  만약 그들의 눈에 띄기만 했더라면 처음에는 쫓아갈 것이고 그러다가 못 잡으면 대고 불질을 했을 겝니다. 부지깽이 같은 그 화승총을 가지고 더구나 호미와 쇠스랑을 다루던 솜씨로 으심치무레한 달밤에 보리밭 사이로 죽자사자 내빼는 사람을 쏜다고 쏘았댔자 제법 똑바로 가서 맞을 이치도 없기로 하지만.

 

  그래 아무튼 발가벗은 윤두꺼비는 무사히 보리밭을 서넛이나 지나, 다시 솔숲을 빠져나와 나직한 비탈에 왜송이 둘러선 산허리에까지 단숨에 달려와서야 비로소 안심과 숨찬 걸 못 견디어 펄씬 주저앉았습니다.

 

  화적이 드는 눈치를 채면, 여느 일 젖혀 놓고 집안 돌아볼 것 없이 몸을 빼쳐 피하는 게 제일 상책입니다.


* 희유끄름하다 : 희읍스름하다, (사물이나 빛이) 맑지 않고 조금 흰 듯하다

* 고의춤 : 고의나 바지의 허리를 접어서 여민 사이

                 ☞ 고의 = 남자의 여름 홑바지. 속속곳(속옷)과 단속곳을 통틀어 이르는 말

* 바투 : 시간이나 길이가 아주 짧게. 두 대상이나 물체의 사이가 썩 가깝게

* 담총 : 어깨에 총을 맴

* 위경 : 위대로운 처지

* 으심치무레하다 : 달빛이 흐릿하고 침침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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