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우리만 빼놓고 어서 망해라-5
사랑채로 들어간 두목이 한 수하를 시켜 웃미닫이를열어 젖히고서 성큼 마루로 올라설 때에 그는 뜻밖에도 이편을 앙연히 노려보고 있는 말대가리 윤용규와 눈이 딱 마주쳤습니다.
두목은 주춤하지 않지 못했습니다. 그는 윤용규가 이 위급한 판에 한 발자국이라도 도망질을 치려고 서둘렀지, 이 다지도 대담하게, 오냐 어서 오란 듯이 버티고 있을 줄은 천만 생각 밖이었던 것입니다. 더욱 핏기 없이 수척한 얼굴에 병색을 띠고서도 일변 악이 잔뜩 올라 이편을 노려보는 그 머리 센 늙은이의 살기스런 양자가 희미한 쇠기름불에 어른거리는 양이라니 무슨 원귀와도 같습니다.
두목은 만약 제 등뒤에 수하들이 겨누고 있는 십여 대의 총부리와 녹슬었으나마 칼들과 몽둥이들과 도끼들이 없었으면 그는 가슴이 서늘한 대로 물심물심 뒤로 물러섰을는지도 모릅니다.
"으응,너 잘 기대리구 있다!"
두목은 하마 꺾이려던 기운을 돋우며 한마디 으릅니다. 실상 이 두목(그러니까 오늘 밤의 이 패들)과 말대가리 윤용규와는 처음 만나는게 아니고 바로 구면입니다. 달포 전에 쳐들어와서 돈 삼백 냥을 빼앗고 그밖에 소 한 마리와 패물과 어음 몇 쪽을 털어 간 그 패들입니다. 그래서 화적패들도 주인을 잘 알려이와 주인 되는 윤용규도 두목의 얼굴만은 익히 알고 있고 그러고도 또 달리 뼈에 사무치는 원혐이 한 가지 있는 터라, 윤용규는 무서운 것보다도(이미 피치 못할 살판인지라) 차차로 옳게 뱃속으로부터 분노와 악이 치받쳐 올랐습니다.
"이 윤가야, 네 들어 보아라!"
두목은 종시 말이 없이 앙연히 앉아 있는 윤용규를 마주 노려보면서 그 역시 찬 음성으로 꾸짓는 것입니다.
"......네가 이놈 관가에다가 찔러서 내 수하를 잡히게 했단 말이지......? 이놈, 그러구두 네가 성할 줄 알었드냐......? 이놈 네가 분명코 찔렀지?"
"오냐, 내가 관가에 들어가서 내 입으로 찔렀다. 그려......?"
퀄퀄하게 대답을 하면서 도사리고 앉은 윤용규의 눈에서는 불이 이는 듯합니다.
"......내가 찔렀으니 어쩔 테란 말이냐......?" 흥! 이놈들, 멀쩡하게 도당 모아 갖구 댕기면서 양민들 노략질이나 히여 먹구, 네가 그러구두 성할 줄 알았더냐? 이놈아......?"
치받치는 악에 소리를 버럭 높이면서 다시,
"......괴수놈, 너두 오래 안 가서 잽힐 테니 두구 보아라! 네 모가지에 작두날이 내릴 때가 머잖었느니라, 이노옴!"
하고는 부드득 이를 갈아 붙입니다.
목전의 절박한 사실에 대한 일종의 발악임은 틀림이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일변 깊이 생각을 하면 하나의 웅장한 선언일 것입니다. 핍박하는 자에게 대한, 일후의 보복과 승리를 보류하는 자신 있는 선언......
* 사랑채 : 집의 안채와 떨어져 있는 바깥주인이 거처하며 손님을 접대하는 곳
* 앙연(怏然)하다 : (마음이) 흡족하지 않고 야속하거나 원망하는데가 있다.
* 원귀 : 원통하게 죽어 한을 품고 있는 귀신
* 종시 : 끝까지 내내
* 퀄퀄하다: 많은양의 액체가 급히 쏟아져 세차게 흐르는 소리가 나다.(혹은 그런 느낌을 주는 경우)
* 치받다: 세차게 들이받다, 위사람에게 맞서 대들다
* 발악 : 온갖 짓을 다 하며 마구 악을 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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