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우리만 빼놓고 어서 망해라-6
사실 윤용규는 무식하고 소박하나마 시대가 차차로 금권이 유세해 감을 막연히 인식을 했던 것입니다.
그것은 그러므로 비단 화적떼에게만 대한 선언인 것이 아니라, 그 야속하고 토색질을 방자히 하는 수령까지도 넣어, 전 압박자에게 대고 부르짖는 선전의 포고이었을 것입니다. 가령 그 자신이 그것을 의식하고 못 하고는 고만두고라도...... 말입니다.
"......이놈들! 밤이 어둡다구, 백년 가두 날이 안 샐 줄 아느냐? 두구 보자, 이놈들!"
윤용규는 연하여 이렇게 살기등등하니 악을 쓰는 것입니다.
"하, 이놈, 희떠운 소리 헌다! 허!"
두목은 서글퍼서 이렇게 헛웃음을 치는데, 마침 윗목에서 이제껏 자고 있던 차인꾼이 그제야 잠이 깨어 푸스스 일어나다가 한참 두릿거리더니 겨우 정신이 나는지 별안간 버얼벌 떨면서 방구석으로 꽁무니 걸음을 해 들어갑니다.
그러자 또 안으로 들어갔던 패 중에 하나가 총 끝에 흰 무명고의 하나를 꿰들고 두목 앞으로 나옵니다.
"두령, 자식놈은 풍겼읍니다!"
"풍겼다? 그럼, 그건 무어라 말이냐?"
"그놈이 울타리를 뛰어넘어 가다가 벗어 버린 껍데기올시다. 자다가 허리띠두 못 매구서 달아나느라구 울타리 밑에서 훌러당 벗어졌나 봅니다."
발가벗고 도망질을 치는 광경을 연상함인지 몇이 킥킥 하고 소리를 죽여 웃습니다.
"으젓잖은 놈들! 어쩌다가 놓친단 말이냐"
두목은 혀를 차다가 방 윗목에서 떨고 있는 차인꾼을 턱으로 가리킵니다.
"......아니 그런 게 아니라 혹시 저놈이 자식놈이 아니냐?"
윤두꺼비는 전번에도 잡히지 않았기 때문에 두목은 그의 얼굴을 몰랐던 것입니다.
두목의 말을 받아 수하 하나가 기웃이 들여다보더니,
"아니올시다, 저놈은 차인꾼이올시다."
"쯧! 그렇다면 헐 수 없고...... 잘 지키기나 해라. 그리고 아직 몽당 숟갈 한 매라도 손대지 말렷다!"
"에-이...... 그런데 술이 좋은 놈 한 독 있읍니다., 두목...... 닭허구, 돼지두 마침 먹을 감이구요......"
전전해 신축년의 큰 흉년이 아니라도, 화적 된 자치고 민가를 털 제 술이며 고기를 눈여겨보지 않는법은 없는 법입니다.
"이놈 윤가야, 말 들어라...... 오늘 저녁에 우리가 네 집에를 온 것은......"
두목은 다시 윤용규에게로 얼굴을 돌리고 을러댑니다.
"......네놈의 재물보담두 너를 쓸 디가 있어서 온 것이다...... 허니, 어쩔테냐? 내 말을 순순히 들을테냐? 안 들을 테야?"
윤용규는 두목을 마주 거듭떠보고 있다가, 말이 끝나자 고개를 홱 돌려 버립니다.
"어쩔 테냐? 말을 못 듣겠단 말이지?"
"불안당놈의 말 들을 수 없다......! 내가, 생각허먼 네놈들을 갈아 먹구 싶은디, 게다가 청을 들어? 흥!"
윤용규는 그새 여러 해 두고 화적을 치러 내던 경험에 비추어 보면, 그들 앞에서 서얼설 기고 네-네 살려 줍시사고 굽신거리거나, 마주 대고 네놈 내놈 하면서 악다구니를 하거나, 필경 매를 맞고 재물을 뺏기기는 일반이던 것을 잘 알고 있읍니다.
그러니 어치피 당하는 마당에, 그처럼 굽실거릴 생각은 애초부터 없었을 뿐 아니라, 일변 그, 이 패에게 대하여 그야말로 갈아 먹고 싶은 원혐입니다.
* 토색질 : 돈이나 물건 따위를 억지로 달라고 하는 짓
* 희떱다 : 말이나 행동이 분에 넘치며 버룻이 없다.
* 서글프다 : 쓸쓸하고 외로워 슬프다. 섭섭하고 언짢다.
* 윗목 : 온돌방에서 아궁이로부터 먼 쪽의 방바닥
* 차인꾼 : 남의 장사하는 일에 시중드는 사람. 임시 심부름꾼으로 부리는 사람
* 꽁무니 : 엉덩이를 중심으로 한 몸의 뒷부분. 사물의 맨 뒤나 끝
* (무명)고 : (무명으로 된) 옷고름이나 노끈 따위의 매듭이 플리지 않도록 한 가닥을 고리처럼 맨 것
* 으젓잖다: 말이나 행동 따위가 점잖지 못하고 가벼운 데가 있다.
* 기웃이 : 무엇을 보려고 고개나 몸 따위를 한쪽으로 조금 기울이는 모양
* 숟갈 : 숟가락
* 서얼설 : 설설, 벌레 따위가 가볍게 기어 다니는 모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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