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포 전인데 이 패에게 노략질을 당하던 날 밤, 그 중에 한 놈, 잘 알 수 있는 자가 섞여 있는 것을 윤용규는 보아 두었읍니다. 그자는 박가라고, 멀리 않은 근동에서 사는 바로 그의 작인이었읍니다.
"오! 이놈 네가!"
윤용규는 제 자신, 작인에게 어떠한 원한받을 짓을 해왔다는 것은 경위에 칠 줄은 모릅니다. 다만 내 땅을 부쳐 먹고 사는 놈이 이 도당에 참예를 하여 내 집을 털러 들어오다니, 눈에서 불이 나고 가슴이 터질 듯 분한 노릇입니다.
이튿날 새벽같이 윤용규는 몸소 읍으로 달려들어가서, 당시 그 고을 원(수령)이요, 수차 토색질을 당한 덕에 안면은 있는 백영규(白永圭)더러, 사분이 이만저만하고 이러저러한데 그 중에 박아무개라는 놈도 섞여 있었다고 그러니 그놈만 잡아다가 족치거드면 그 일당을 다 잡을 수가 있으리라고 아뢰어 바쳤읍니다.
백영규는 그러나 말대가리 윤용규보다 한길 윗수였읍니다.
그는 자초지종 이야기를 다 듣더니, 아 그러냐고, 그러면 박가라는지 그놈을 잡아오기는 올 것이로되, 그러나 화적패에 투신한 놈을 그처럼 잘 알진대 윤용규 너도 미심쩍어, 그러니 같이 문초를 해야 하겠은즉 그리 알라고, 우선 윤용규부터 때려 가두었읍니다.
약은 수령이 백성의 재물을 먹자고 트집을 잡는데 무슨 사리와 경우가 있나요? 루이 십사센지 하는 서양 임금은 짐이 바로 국가라고 호통을 했고 조선서도 어느 종실 세도(宗室勢道) 한 분은 반대파의 죄수를 국문하는데, 참새가 찍한다고 해도 죽이고, 짹 한다고 해도 죽이고, 필경은 찍짹 합니다 해도 죽였다고 하지 않습니까?
당시 일읍(一邑)의 수령이면 그 고장에서는 왕이요, 그의 덮어놓고 하는 공사는 바로 법과 다를 바 없던 것입니다. 항차 그는 화적을 잡기보다는 부자를 토색하기가 더 긴하고 재미가 있는 데야.
말대가리 윤용규는 혹을 또 한 개 덜렁 붙이고서 옥에 갇히고, 박가도 그날로 잡혀 들어왔읍니다.
* 근동(近洞) : 가까운 이웃 동네
* 작인(作人) : 다른 사람의 농지를 빌려 농사를 짓고 그 대가로 사용료를 지급하는 사람
* 경위(涇渭) : 사리의 옳고 그름이나, 이러하고 저러함에 대한 분별. ※유사어 : 경우
* 도당(徒黨) : 불순한 사람의 무리
* 사분(私憤) : 개인의 일로 일어나는 사사로운 분노, 또는 사적인 일로 느끼는 분노
* 한길 = 한수 ※ 한길 : 넓고 큰 길
* 자초지종(自初至終) : 처음부터 끝까지의 과정
* 문초(問招) : 죄나 잘못을 따져 묻거나 심문함
* 일읍(一邑) : 한 고을. ※고을 : 조선시대 주(州), 부(府), 군(郡), 현(縣) 등을 두루 이르던 말
* 공사(公事) : 조선 시대에 소송을 속되게 이르던 말. 국가나 공공 단체의 일,
* 항차 : 앞 내용보다 뒤 내용에 대하여 더 강한 긍정을 나타낼 대 쓰이는 부사. ※유사어 : 하물며, 더구나
* 토색하다 : 돈이나 물건 따위를 억지로 달라고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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