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우리만 빼놓고 어서 망해라-1
얼굴이 말(馬面)처럼 길대서 말대가리라는 별명을 듣던 윤직원 영감의 선친 윤용규는 본이 시골 토반(土班)이더냐 하면 그렇지도 못하고, 그렇다고 아전(衙前)이더냐 하면 실상은 아전질도 제법 해먹지 못했습니다. 아전질을 못 해먹은 것이 시방 와서는 되레 자랑거리가 되었지만, 그때 당년에야 흔한 도서원(道書院)이나마 한 자리 얻어 하고 싶은 생각이 꿀안 같았어도, 도시에 그만한 밑천이며 문필이며가 없었더랍니다.
말대가리 윤용규 그는, 삼십이 넘도록 탈망 바람으로 삿갓 하나를 의관삼아 촌 노름방으로 으실으실 돌아다니면서 개평꾼이나 뜯으면 그걸로 되돌아 앉아 투전장이나 뽑기, 방퉁이질이나 하기, 또 그도 저도 못하면 가난한 아내가 주린 배를 틀어쥐고서 바느질품을 팔아 어린 자식과(이 어린 자식이라는게 그러니까 지금의 윤직원 영감입니다) 입에 풀칠을 하는 것을 얻어먹고는 밤이나 낮이나 질펀히 드러누워 소대성(蘇大成)이 여대치게 낮잠이나 자기...... 이 지경으로 반생을 살았습니다. 좀 호협한 구석이 있고 담보가 클 뿐, 물론 판무식꾼이구요.
그런데 그런 게 다 운수라고 하는 건지, 어느 해 연분인가는 난데없는 돈 이백냥이 생겼더랍니다. 시골돈 이백 냥이면 서울돈으로 이천냥이요, 그때만 해도 웬만한 새끼부자 하나가 왔다갔다할 큰 돈입니다. 노름을 해서 딴 돈이라고 하기도 하고, 혹은 그 아내가 친정의 머언 일갓집 백부한테 분재를 타온 돈이라고 하기도 하고 또 누구는 도깨비가 져다 준 돈이라고 하기도 하고 하여 자못 출처가 모호했습니다.
시방이야 가난하던 사람이 불시로 큰돈이 생기면 경찰서 양반들이 우선 그 내력을 밝히려 들지만 그때만 해도 육십 년 저쪽 일이니 누가 지날 말로라도 시비 한마딘들 하나요. 그저 그야말로 도깨비가 져다 주었나 보다 하고 한갓 부러워하기나 했지요.
아무튼 그래 말대가리 윤용규는 그날부터 칼로 물 벤 듯 노름방 발을 끊고, 그 돈 이백 냥을 들여 논을 산다, 대푼변 돈놀이를 한다, 곱장리를 놓는다 해가면서 일조에 착실한 살림꾼이 되었습니다. 그러노라니까, 정말 인도깨비를 사귄 것처럼 살림이 불 일듯 늘어서, 마침내 그의 당대에 삼척 석을 넘겨받게 되었던 것입니다.
* 토반(土班) : 여러 대(代)로 그 지방에서 붙박이로 사는 양반
* 아전(衙前) : 조선 시대에 중앙과 지방의 관아에 속한 구실아치
☞ 구실아치 : 조선 시대에 각 관아의 벼슬아치 밑에서 일을 보던 사람
☞ 아치 : 그 일에 종사하는 사람'의 뜻을 더하는 접미사
* 되레 : '도리어'의 준말
* 도서원(道書院) :?
* 탈망 : 머리에 쓴 망건을 벗음
☞ 망건 : 상투를 튼 사람이 머리카락을 걷어 올려 흘러내리지 않도록 머리에 두르는 그물처럼 생긴 물건
* 으실으실 : '어슬렁어슬렁'의 비표준어
* 방퉁이질 : 노름판 같은 데서 노름은 하지 않으면서 그 옆에 붙어서 참견하는 짓(훈수)
* 질펀히 : 주저앉아 하는 일 없이 늘어져 있는 모습으로
* 소대성(蘇大成) : 고전 소설 〈소대성전〉의 주인공 이름으로 잠이 몹시 많은 사람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
* 여대치다 : 능력이나 수준 등에서 훨씬 넘어서다
* 판무식꾼 : 아주 무식한 사람을 낮잡아 이르는 말
☞ 낮잡다 : 실제 값보다 낮게 치다. 낮추어 대하다
* 대푼변 : 100분의 1이 되는 이자
* 곱장리 : 곱으로 받는 이자
* 인도깨비 : 사람 모양을 한 도깨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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