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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0년대22

채만식 '태평천하' 30 - 이 고씨는, 말하자면 이 세상...... 이 고씨는, 말하자면 이 세상 며느리의 썩 좋은 견본이라고 하겠습니다.    ---암캐 같은 시어머니, 여우나 꽁꽁 물어 가면 안방 차지도 내 차지, 곰방조대도 내 차지.  대체 그 시어머니라는 종족이 며느리라는 종족한테 얼마나 야속스러운 생물이거드면, 이다지 박절할 속담까지 생겼습니다.   열여섯 살에 시집을 온 고씨는 올해 마흔일곱이니, 작년 정월 시어머니 오씨가 죽는 날까지 꼬박 삼십일 년 동안 단단히 그 시집살이라는 걸 해왔습니다.  사납대서 살쾡이라는 별명을 듣고, 인색하대서 진지리꼽재기라는 별명을 듣고, 잔말이 많대서 담배씨라는 별명을 듣고 하던 시어머니 오씨(그러니까 바로 윤직원 영감의 부인이지요), 그 손 밑에서 삼십일 년 동안 설운 눈물 많이 흘리고 고씨는 시집살이를 해오다가, 작년 정월.. 2024. 11. 4.
채만식 '태평천하' 29 - 반주 석잔이 끝난 뒤에 윤직원 영감은...... 반주 석잔이 끝난 뒤에 윤직원 영감은 비로소 금으로 봉을 박은 은숟갈을 뽑아 들고 마악 밥을 뜨려다가 문득 고개를 쳐들더니 심상찮게 두 손자며느리를 건너다봅니다.     "아―니, 야덜아……." 내는 말조가 과연 졸연찮습니다.     "……늬들, 왜 내가 시키넌 대루 않냐? 응?"   두 손자며느리는 벌써 거니를 채고서 고개를 떨어뜨립니다. 윤직원 영감은 밥이 새하얀 쌀밥인 걸 보고서, 보리를 두지 않았다고 그걸 탄하던 것입니다.     "……보리, 벌써 다아 먹었냐?"    "안직 있어요!"   맏손자며느리가 겨우 대답을 합니다.     "워너니 아직 있을 티지…… 그런디, 그러먼 왜 이렇기 맨쌀만 히여 먹냐? 응?" 조져도 아무도 대답이 없습니다.     "……그래, 내가 허넌 말은 동네 개 짖넌 소.. 2024. 10. 21.
채만식 '태평천하' 28 - 밥상을 받은 윤직원 영감은...... 밥상을 받은 윤직원 영감은 방 안을 한바퀴 휘휘 둘러보더니,     "태식이는 어디 갔느냐?" 하고 누구한테라 없이 띄워 놓고 묻습니다. 윤직원 영감이 인간 생긴 것치고 이 세상에서 제일 귀애하는 게 누구냐 하면, 시방 어디 갔느냐고 찾는 태식입니다. 지금 열다섯 살이고 나이로는 증손자 경손이와 동갑이지만, 아들은 아들입니다. 그러나 본실 소생은 아니고, 시골서 술에미〔酒女〕를 상관한 것이 그걸 하나 보았던 것입니다. 배야 뉘 배를 빌려 생겨났든 간에 환갑이 가까워서 본 막내둥이니, 아버지로 앉아서야 이뻐할 건 당연한 노릇이겠지요. 하물며 낳은 지 삼칠일 만에 어미한테서 데려다가 유모를 두고 집안의 뭇 눈치 속에서 길러 낸 천덕꾸러기니, 여느 자식보다 불쌍히 여겨서라도 한결 귀애할 게 아니겠다구요.   .. 2024. 10. 5.
채만식 '태평천하' 27 - 윤직원 영감은 그처럼...... 5. 마음의 빈민굴  윤직원 영감은 그처럼 부민관의 명창대회로부터 돌아와서, 대문 안에 들어서던 길로 이 분풀이, 저 화풀이를 한데 얹어 그 알뜰한 삼남이 녀석을 데리고 며느리 고씨더러, 짝 찢을 년이니 오두가 나서 그러느니 한바탕 귀먹은 욕을 걸찍하게 해주고 나서야 적이 직성이 풀려, 마침 또 시장도 한 판이라 의관을 벗고 안방으로 들어갔습니다.   아랫목으로 펴놓은 돗자리 위에 방 안이 온통 그들먹하게시리 발을 개키고 앉아 있는 윤직원 영감 앞에다가, 올망졸망 사기 반상기가 그득 박힌 저녁상을 조심스레 가져다 놓는 게 둘째손자며느리 조씹니다. 방금, 경찰서장감으로 동경 가서 어느 사립대학의 법과에 다니는 종학(鍾學)의 아낙입니다.  서울 태생이요 조대비의 서른일곱촌인지 아홉촌인지 되는 양반집 규수요,.. 2024. 9. 25.
채만식 '태평천하' 26- 윤두꺼비는 이윽고...... 윤두꺼비는 이윽고 세상이 평안한 뒤엔 집안의 문벌 없음을 섭섭히 여겨 가문을 빛나게 할 필생의 사업으로 네 가지 방책을 추렸습니다.   맨 처음은 족보에다가 도금(鍍金)을 했습니다. 그럼직한 일가들을 추겨 가지고 보소(譜所)를 내놓고는, 윤두섭의 제 몇 대 윤아무개는 무슨 정승이요, 제 몇 대 윤아무개는 무슨 판서요, 제 몇 대 아무는 효자요, 제 몇 대 아무 부인은 열녀요, 이렇게 그럴싸하니 족보(族譜)를 새로 꾸몄습니다. 땅 짚고 헤엄치기지요. 그러노라고 한 이천 원 돈이 들었습니다.  그렇지만 일이 수나로운 만큼, 그러한 족보 도금이야 조상 치레나 되었지, 그리 신통할 건 없었습니다. 아무 데 내놓아도 말대가리 윤용규 자식 윤두꺼비요, 노름꾼 윤용규의 자식 윤두섭인걸요. 자연, 허천 들린 뱃속처럼 .. 2024. 9. 5.
채만식 '태평천하' 25 - 이윽고 노적과 곡간에서...... 이윽고 노적과 곡간에서 하늘을 찌를 듯 불길이 솟아오르고, 동네 사람들이 그제야 여남은 모여들어 부질없이 물을 끼얹고 하는 판에, 발가벗은 윤두꺼비가 비로소 돌아왔습니다. 화적은 물론 벌써 물러갔고요.  윤두꺼비는 피에 물들어 참혹히 죽어 넘어진 부친의 시체를 안고 땅을 치면서,     "이놈의 세상이 어느 날에 망하려느냐!" 고 통곡을 했습니다. 그리고 울음을 진정하고도 불끈 일어서 이를 부드득 갈면서,      "오―냐, 우리만 빼놓고 어서 망해라!"  고 부르짖었습니다. 이 또한 웅장한 절규이었습니다. 아울러, 위대한 선언이었고요.    윤직원 영감이 젊은 윤두꺼비 적에 겪던 경난의 한 토막이 대개 그러했습니다.     그러니, 그러한 고난과 풍파 속에서 모아 마침내는 피까지 적신 재물이니, 그런 .. 2024. 8. 28.
채만식 '태평천하' 24 - 윤용규는 아주 각오를 했읍니다. 윤용규는 아주 각오를 했습니다. 행악은 어차피 당해 둔 것, 또 재물도 약간 뺏겨든 둔 것, 그렇다고 저희가 내 땅에다가 네 귀퉁이에 말뚝을 박고 전답을 떠가지는 못할 것, 그러니 저희의 청을 들어 삼천 냥을 들여서 박가를 빼놓아 주느니보다는 월등 낫겠다고, 이렇게 이해까지 따진 끝의 각오이던 것입니다.   "진정"   두목은 한번 더 힘을 주어 다집니다.   "오-냐, 날 죽이기밖으 더 헐 테야?"  "저놈 잡아 내랏!"   윤용규의  말이 미처 떨어지기 전에 두목이 뒤를 돌려다 보면서 호령을 합니다. 등뒤에 모여 섰던 수하 중에 서넛이 나가 우르르 방으로 몰려 들어 가더니 왁진왁진 윤용규를 잡아 끕니다. 그러자 마침 안채로난 뒷문이 와락 열리더니, 흰 머리채를 풀어 헤뜨린 윤용규의 노처가 아이구머니 .. 2024. 8.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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