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 물 붓다 말고 배를 쓰다듬으면서 그대로 논둑으로 기어올랐다. 그리고 겨드랑이에 꼈던 벼 담기 키를 그냥 땅바닥에 털썩 떨러치며 나도 털썩 주저앉았다. 일이 암만 바빠도 나 배 아프면 고만이니까. 아픈 사람이 누가 일을 하느냐. 파릇파릇 돋아 오른 풀 한 숲을 뜯어 들고 다리의 거머리를 쓱쓱 문대며 장인님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가운데서 장인님이 이상한 눈을 해가지고 한참을 날 노려보더니
"너 이 자식 왜 또 이래 응?"
"배가 좀 아파서유!"
하고 풀 위에 슬며시 쓰러지니까 장인님은 약이 올랐다. 저도 논에서 철벙철벙 둑으로 올라오더니 잡은 참 내 멱살을 움켜잡고 뺨을 지는 것는 아닌가
"이 자식아 일하다 말면 누굴 망해 놀 속셈이냐. 이 대가릴 까놀 자식?"
우리 장인님은 약이 오르면 이렇게 손버릇이 아주 못됐다. 또 사위에게 이자식 저자식 하는 장인님이 어디 있느냐. 오죽해야 우리 동리에서 누굴 물론하고 그에게 욕을 안 먹는 사람은 명이 짜르다 한다. 조그만 아이들까지도 그를 돌아세 놓고 욕필이(본 이름이 봉필이니까) 욕필이 하고 손가락질을 할 만치 두루 인심을 잃었다. 하나 인심을 잃었다면 욕보다 읍의 배참봉 댁 마름으로 더 잃었다. 번이 마름이란 욕 잘하고 사람 잘 치고 그리고 생김 생기길 호박개 같아야 쓰는 거지만 장인님은 외양에 똑 댔다. 장인께 닭 마리나 좀 보내지 않는다든가 애벌논 때 품을 좀 안 준다든가 하면 그해 가을에는 영락없이 땅이 뚝뚝 떨어진다. 그러면 미리부터 돈도 먹거 술도 먹이고 안달재신으로 돌아치던 놈이 그 땅을 쓸쩍 돌아앉는다. 이바람에 장인님 집 외양간에는 눈깔 커다란 황소 한 놈이 절로 엉금엉금 기어들고 동리 사람들은 그 욕을 다 먹어 가면서도 그래도 굽신굽신하는 게 아닌가.
○ 논둑 : 논의 가장자리에 높고 길게 쌓아 올린 방죽
○ 암만 : 아무리
○ 파릇파릇 : 산뜻하게 군데군데 파르스름한 모양
○ 철벙철벙 : '철버덩철버덩' 의 준말, 묵직한 물체가 물에 반복적으로 거칠게 부딪치는 소리
○ 마름 : 지주를 대리해서 소작권을 관리하는 사람
○ 호박개 : 뼈대가 굵고 털이 북슬북슬한 개
○ 번이 : 본래
○ 외양 : 겉모양
○ 애벌논 : 첫 김매기를 한 논 ※ 김매기 = 논밭의 잡초를 뽑는 일
○ 품 : 어떤 일에 드는 힘이나 수고. 삯을 받고 하는 일
○ 안달재신 : 몹시 속을 태우며 여기저기로 다니는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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