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나 내겐 장인님이 감히 큰소리할 계제가 못 된다. 뒤생각은 못 하고 뺨 한 개를 딱 때려 놓고는 장인님은 무색해서 덤덤히 쓴 침만 삼킨다. 난 그 속을 퍽 잘 안다. 조금 있으면 갈도 꺽어야 하고 모도 내야 하고 한창 바쁜 때인데 나 일 안 하고 우리집으로 그냥 가면 고만이니까. 작년 이맘때도 트집을 좀 하니까 늦잠 잔다고 돌멩이를 집어던져서 자는 놈의 발목을 삐게 해놨다. 사날씩이나 건숭 끙 끙 앓았더니 종당에는 거반 울상이 되지 않았는가.
"얘 그만 일어나 일 좀 해라. 그래야 올 갈에 벼 잘 되면 너 장가들지 않니"
그래 귀가 번쩍 띄어서 그날로 일어나서 남이 이틀 품 들일 논을 혼자 삶아 놓으니까 장님님도 눈깔이 커다랗게 놀랐다. 그럼 정말로 가을에 와서 혼인을 시켜 줘야 원 경우가 옳지 않겠나 볏섬을 척척 들여 쌓아도 다른 소리는 없고 물동이를 이고 들어오는 점순이를 담배통으로 가리키며
"이 자식아 미처 커야지 조걸 무슨 혼인을 한다고 그러니 원!"
하고 남 낯짝만 붉게 해주고 고만이다. 골김에 그저 이 논이 장인님 하고 댓돌에다 메꽂고 우리 고향으로 내뺄까 하다가 꾹꾹 참고 말았다.
참말이지 난 이꼴 하고는 집으로 차마 못 간다. 장가를 들러 갔다가 오죽 못났으야 그대로 쫓겨 왔느냐고 손가락질을 받을 테이까......
○ 계제(階 섬돌 계, 梯 사다리 제) : 원래 계단과 사다리란 뜻. 어떤 일을 할 수 있게 된 형편이나 기회를 말할 때 쓰임.
○ 트집 : 공연히 작은 흠을 들추어 내는 불평 혹은 말썽
○ 사날 : 사나흘, 사흘 내지는 나흘 , 3일 내지는 4일
○ 종당 : 일의 마지막
○ 볏섬 : 벼를 담은 섬.
※ 섬 : 곡식 따위를 담기 위하여 짚으로 엮어 만든 그룻부피의 단위로 곡식/가루 따위의 부피를 잴 때 씀
○ 낯짝 : 낯의 속된(낮추어) 표현
※ 낯 : 눈, 코 입 따위가 있는 얼굴의 바닥
○ 골김 : 비위에 거슬리거나 마음이 불편해서 성질이 나 생기는 김 (氣)
○ 댓돌 : 집체의 떨러지는 물 안쪽으로 돌려 가며 놓은 돌, 집체의 앞뒤에 오르내릴 수 있게 놓은 돌층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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