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따 밥만 많이 먹게 되면 팔자는 고만 아니냐. 한데 한 가지 파가 있다면 가끔가다 몸이(장인님은 이걸 채신이 없이 들까분다고 하지만) 너무 빨리빨리 논다. 그래서 밥을 나르다가 때없이 풀밭에서 깻박을 쳐서 흙투성이 밥을 곧잘 먹인다. 안 먹으면 무안해할까 봐서 이걸 씹고 앉았노라면 으적으적 소리만 나고 돌을 먹는 겐지 밥을 먹는겐지…….
그러나 이날은 웬일인지 성한 밥채로 밭머리에 곱게 내려놓았다. 그리고 또 내외를 해야 하니까 저만큼 떨어져 이쪽으로 등을 향하고 웅크리고 앉아서 그릇 나기를 기다린다. 내가 다 먹고 물러섰을 때 그릇을 와서 챙기는데, 그런데 난 깜짝 놀라지 않았느냐. 고개를 푹 숙이고 밥함지에 그릇을 포개면서 날더러 들으라는지 혹은 제 소린지,
“밤낮 일만 하다 말 텐가!”
하고 혼자 쫑알거린다. 고대 잘 내외하다가 이게 무슨 소린가, 하고 난 정신이 얼떨떨했다. 그러면서도 한편 무슨 좋은 수가 있는가 싶어서 나도 공중을 대고 혼자말로,
“그럼 어떡해?”
하니까,
“성례시켜 달라지 뭘 어떡해…….”
하고 되알지게 쏘아붙이고 얼굴이 발개져서 산으로 그저 도망질을 친다.
나는 잠시 동안 어떻게 되는 셈판인지 맥을 몰라서 그 뒷모양만 덤덤히 바라보았다. 봄이 되면 온갖 초목이 물이 오르고 싹이 트고 한다. 사람도 아마 그런가 보다, 하고 며칠내에 부쩍(속으로) 자란 듯싶은 점순이가 여간 반가운 것이 아니다. 이런 걸 멀쩡하게 안직 어리다구 하니까…….
○ 팔자 : 사주팔자의 줄임말
○ 채신 : 처신을 낮추어 이르는 말 , ※ 처신(處身) = 세상을 살아가는 데 가져야할 몸가짐과 행동
○ 깻박 : 깨 바가지, ※ 깻박치다 : 그릇 따위를 떨어뜨려 속에 있던 것이 산산이 흩어지게 하다.
○ 채 : 이미 있는 상태 그대로 흐트름 없는 그대로 있음을 나타내는 의존명사
○ 밭머리 : 밭이랑의 양쪽 끝이 되는 곳
○ 함지 : 나무로 네모지게 짜서 만든 그릇, 콩나무 속을 파서 큰 바가지같이 만든 그릇
○ 되알지다 : 힘주는 맛이나 억짓손이 몹시 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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