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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글 읽기/김유정-봄봄

김유정 '봄봄' 8 - 우리가 구장님을......

by 구름은 자유롭다 2023. 11.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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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가 구장님을 찾아갔을 때 그는 싸리문 밖에 있는 돼지우리에서 죽을 퍼주고 있었다. 서울엘 좀 갔다 오더니 사람은 점잖아야 한다고 웃쇰이(얼른 보면 지붕 위에 앉은 제비 꼬랑지 같다) 양쪽으로 뾰족이 뻗치고 그걸 에헴, 하고 늘 쓰다듬는 손버릇이 있다. 우리를 멀뚱히 쳐다보고 미리 알아챘는지

    “왜 일들 허다 말구 그래?”

  하더니 손을 올려서 그 에헴을 한번 후딱 했다.

    “구장님! 우리 장인님과 에 계약하기를…….”

  먼저 덤비는 장인님을 뒤로 떠다밀고 내가 허둥지둥 달려들다가 가만히 생각하고

    “아니 우리 빙장님과 츰에”

  하고 첫번부터 다시 말을 고쳤다. 장인님은 빙장님 해야 좋아하고 밖에 나와서 장인님 하면 괜스레 을 내려 든다. 뱀두 뱀이래야 좋으냐구 창피스러우니 남 듣는 데는 제발 빙장님, 빙모님, 하라구 일상 당조짐을 받아 오면서 난 그것도 자꾸 잊는다. 당장도 장인님 하다 옆에서 내 발등을 꾹 밟고 곁눈질을 흘기는 바람에야 겨우 알았지만…….

 

  구장님도 내 이야기를 자세히 듣더니 퍽 딱한 모양이었다. 하기야 구장님뿐만 아니라 누구든지 다 그럴 게다. 길게 길러 둔 새끼손톱으로 코를 후벼서 저리 탁 튀기며

    “그럼 봉필 씨! 얼른 성례를 시켜 주구려, 그렇게까지 제가 하구 싶다는 걸…….”

  하고 내 짐작대로 말했다. 그러나 이 말에 장인님은 삿대질로 눈을 부라리고

    “아 성례구 뭐구 계집애년이 미처 자라야 할 게 아닌가?”

  하니까 고만 멀쑤룩해서 입맛만 쩍쩍 다실 뿐이 아닌가.

    “그것두 그래!”

    “그래, 거진 사 년 동안에도 안 자랐다니 그 킨 은제 자라지유? 다 그만두구 사경 내슈…….”

    “글쎄, 이 자식아! 내가 크질 말라구 그랬니, 왜 날 보구 떼냐?”

    “빙모님은 참새만한 것이 그럼 어떻게 앨 낳지유?(사실 장모님은 점순이보다도 귀때기 하나가 작다.)”

  장인님은 이 말을 듣고 껄껄 웃더니(그러나 암만해두 돌 씹은 상이다) 코를 푸는 척하고 날 은근히 곯리려고 팔꿈치로 옆 갈비께를 퍽 치는 것이다. 더럽다. 나도 종아리의 파리를 쫓는 척하고 허리를 구부리며 그 궁둥이를 콱 떼밀었다. 장인님은 앞으로 우찔근하고 싸리문께로 쓰러질 듯하다 몸을 바로 고치더니 눈총을 몹시 쏘았다. 이런 상년의 자식! 하곤 싶으나 남의 앞이라서 차마 못 하고 섰는 그 꼴이 보기에 퍽 쟁그라웠다.


○ 싸리문 : 사립문, 싸릿가지를 엮어 만든 문    ※ 싸리나무 = 콩과의 납엽 활엽 나무 

○ 웃쇰 : 윗 수염

○ 츰 : 처음

○ 괜스레 : 까닭이나 실속이 없는 데가 있게

○ 골 : 비위에 거슬리거나 언짢은 일을 당하여 벌컥 내는 화

○ 당조짐 : 정신을 차리도록 단단히 단속하고 조임

○ 구장 : 일제치하에서 쓰던 행적구역의 최말단 직책 , 지금의 마을의 이장 혹은 통장

○ 삿대질 : 말다툼을 할 때 주먹이나 손가락 따위를 상대편 얼굴 쪽으로 내지름 또는 그런 짓

○ 멀쑤룩하다 : 머쓱하다    ※ 머쓱하다 = 무안을 당하거나 흥이 꺽여 어색하다

○ 다시다 : 음식을 먹을 때처럼 침을 삼키며 입을 놀리다.

○ 은제 : 언제

○ 쟁그랍다 : 보거나 만지기에 소름이 끼칠 정도로 조금 흉하거나 끔찍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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