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구장님을 찾아갔을 때 그는 싸리문 밖에 있는 돼지우리에서 죽을 퍼주고 있었다. 서울엘 좀 갔다 오더니 사람은 점잖아야 한다고 웃쇰이(얼른 보면 지붕 위에 앉은 제비 꼬랑지 같다) 양쪽으로 뾰족이 뻗치고 그걸 에헴, 하고 늘 쓰다듬는 손버릇이 있다. 우리를 멀뚱히 쳐다보고 미리 알아챘는지
“왜 일들 허다 말구 그래?”
하더니 손을 올려서 그 에헴을 한번 후딱 했다.
“구장님! 우리 장인님과 츰에 계약하기를…….”
먼저 덤비는 장인님을 뒤로 떠다밀고 내가 허둥지둥 달려들다가 가만히 생각하고
“아니 우리 빙장님과 츰에”
하고 첫번부터 다시 말을 고쳤다. 장인님은 빙장님 해야 좋아하고 밖에 나와서 장인님 하면 괜스레 골을 내려 든다. 뱀두 뱀이래야 좋으냐구 창피스러우니 남 듣는 데는 제발 빙장님, 빙모님, 하라구 일상 당조짐을 받아 오면서 난 그것도 자꾸 잊는다. 당장도 장인님 하다 옆에서 내 발등을 꾹 밟고 곁눈질을 흘기는 바람에야 겨우 알았지만…….
구장님도 내 이야기를 자세히 듣더니 퍽 딱한 모양이었다. 하기야 구장님뿐만 아니라 누구든지 다 그럴 게다. 길게 길러 둔 새끼손톱으로 코를 후벼서 저리 탁 튀기며
“그럼 봉필 씨! 얼른 성례를 시켜 주구려, 그렇게까지 제가 하구 싶다는 걸…….”
하고 내 짐작대로 말했다. 그러나 이 말에 장인님은 삿대질로 눈을 부라리고
“아 성례구 뭐구 계집애년이 미처 자라야 할 게 아닌가?”
하니까 고만 멀쑤룩해서 입맛만 쩍쩍 다실 뿐이 아닌가.
“그것두 그래!”
“그래, 거진 사 년 동안에도 안 자랐다니 그 킨 은제 자라지유? 다 그만두구 사경 내슈…….”
“글쎄, 이 자식아! 내가 크질 말라구 그랬니, 왜 날 보구 떼냐?”
“빙모님은 참새만한 것이 그럼 어떻게 앨 낳지유?(사실 장모님은 점순이보다도 귀때기 하나가 작다.)”
장인님은 이 말을 듣고 껄껄 웃더니(그러나 암만해두 돌 씹은 상이다) 코를 푸는 척하고 날 은근히 곯리려고 팔꿈치로 옆 갈비께를 퍽 치는 것이다. 더럽다. 나도 종아리의 파리를 쫓는 척하고 허리를 구부리며 그 궁둥이를 콱 떼밀었다. 장인님은 앞으로 우찔근하고 싸리문께로 쓰러질 듯하다 몸을 바로 고치더니 눈총을 몹시 쏘았다. 이런 상년의 자식! 하곤 싶으나 남의 앞이라서 차마 못 하고 섰는 그 꼴이 보기에 퍽 쟁그라웠다.
○ 싸리문 : 사립문, 싸릿가지를 엮어 만든 문 ※ 싸리나무 = 콩과의 납엽 활엽 나무
○ 웃쇰 : 윗 수염
○ 츰 : 처음
○ 괜스레 : 까닭이나 실속이 없는 데가 있게
○ 골 : 비위에 거슬리거나 언짢은 일을 당하여 벌컥 내는 화
○ 당조짐 : 정신을 차리도록 단단히 단속하고 조임
○ 구장 : 일제치하에서 쓰던 행적구역의 최말단 직책 , 지금의 마을의 이장 혹은 통장
○ 삿대질 : 말다툼을 할 때 주먹이나 손가락 따위를 상대편 얼굴 쪽으로 내지름 또는 그런 짓
○ 멀쑤룩하다 : 머쓱하다 ※ 머쓱하다 = 무안을 당하거나 흥이 꺽여 어색하다
○ 다시다 : 음식을 먹을 때처럼 침을 삼키며 입을 놀리다.
○ 은제 : 언제
○ 쟁그랍다 : 보거나 만지기에 소름이 끼칠 정도로 조금 흉하거나 끔찍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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