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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글 읽기/채만식-태평천하

채만식 '태평천하' 1 - 추석이 지나 이윽고......

by 구름은 자유롭다 2024. 1. 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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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윤직원 영감 귀택지도(歸宅之圖)-1

 

  추석을 지나 이윽고, 짙어 가는 가을 해가 저물기 쉬운 어느 날 석양.

  저 계동(桂洞)의 이름 난 장자〔富者〕윤직원(尹直員) 영감이 마침 어디 출입을 했다가 방금 인력거를 처억 잡숫고 돌아와, 마악 댁의 대문 앞에서 내리는 참입니다.

  간밤에 꿈을 잘못 꾸었던지, 오늘 아침에 마누라하고 다툼질을 하고 나왔던지, 아무튼 엔간히 일수 좋지 못한 인력거꾼입니다. 여느 평탄한 길로 끌고 오기도 무던히 힘이 들었는데 골목쟁이로 들어서서는 빗밋이 경사가 진 이십여 칸을 끌어올리기야, 엄살이 아니라 정말 혀가 나올 뻔했습니다.

  이십팔 , 하고도 육백 몸메……! 윤직원 영감의 이 체중은, 그저께 춘심이년을 데리고 진고개로 산보를 갔다가 경성우편국 바로 뒷문 맞은편, 아따 무어라더냐 그 양약국 앞에 놓아 둔 앉은뱅이저울에 올라 서본 결과, 춘심이년이 발견을 했던 것입니다.

  이 이십팔 관 육백 몸메를, 그런데, 좁쌀계급인 인력거꾼은 그래도 직업적 단련이란 위대한 것이어서, 젖 먹던 힘까지 아끼잖고 겨우겨우 끌어올려 마침내 남대문보다 조금만 작은 솟을대문 앞에 채장을 내려놓곤, 무릎에 드렸던 담요를 걷기까지에 성공을 했습니다.

  윤직원 영감은 옹색한 좌판에서 가까스로 뒤를 쳐들고, 자칫하면 넘어 박힐 듯싶게 휘뚝휘뚝하는 인력거에서 내려오자니 여간만 옹색하고 조심이 되는 게 아닙니다.

    "야, 이 사람아……!"

  윤직원 영감은 혼자서 내리다 못해 필경 인력거꾼더러 걱정을 합니다.

  "……좀 부축을 히여 줄 것이지. 그냥 그러구 뻐언허니 섰어야 옳담 말잉가?"

  실상인즉 뻔히 섰던 것이 아니라, 가쁜 숨을 돌리면서 땀을 씻고 있었던 것이나, 인력거꾼은 책망을 듣고 보니 미상불 일이 좀 죄송하게 되어, 그래 얼핏 팔을 붙들어 부축을 해드립니다.

  내려선 것을 보니, 진실로 거판진 체집입니다.

  허리를 안아 본다면, 아마 모르면 몰라도 한 아름하고도 반은 실히 될까 봅니다. 그런데다가 키도 알맞게 다섯  아홉 는 넉넉합니다. 얼핏 알아듣기 쉽게 빗대면, 지금 그가 타고 온 인력거가 장난감 같고, 그 큰 대문간이 들어서기도 전에 사뭇 그들먹합니다.

  얼굴도 좋습니다. 거금 삼십여 년 전에 몇 해를 두고 부안(扶安), 변산(邊山)을 드나들면서 많이 먹은 (茸)이며 저혈(猪血) 장혈(獐血)이며, 또 요새도 장복을 하는 인삼 등속의 약효로 해서 얼굴은 불콰하니 동안(童顔)이요, 게다가 많지도 적지도 않게 꼬옥 알맞은 수염은 눈같이 희어, 과시 홍안백발의 좋은 풍신입니다. 초리가 길게 째져 올라간 봉의 눈, 준수하니 복이 들어 보이는 코, 부리가 추욱 처진 귀와 큼직한 입모, 다아 수부귀다남자(壽富貴多男子)의 상입니다.

  나이……? 올해 일흔두 살입니다. 그러나 시삐 여기진 마시오. 심장 비대증으로 천식(喘息)기가 좀 있어 망정이지, 정정한 품이 서른 살 먹은 장정 여대친답니다. 무얼 가지고 겨루든지 말이지요.

  그 차림새가 또한 혼란스럽습니다. 옷은 안팎으로 윤이 지르르 흐르는 모시 진솔 것이요, 머리에는 탕건에 받쳐 죽영(竹纓) 달린 통영갓〔統營笠〕이 날아갈 듯 올라앉았습니다. 발에는 크막하니 솜을 한 근씩은 두었음직한 흰 버선에, 운두 새까만 마른신을 조그맣게 신고, 바른손에는 은으로 개대가리를 만들어 붙인 화류 개화장이요, 왼손에는 서른네 살배기 묵직한 합죽선입니다. 이 풍신이야말로 아까울사, 옛날 세상이었더면 일도(一道) 방백(方伯)일시 분명합니다. 그런 것을 간혹 입이 비뚤어진 친구는 광대로 인식 착오를 일으키고 동경, 대판의 사탕장수들은 캐러멜 대장감으로 침을 삼키니 통탄할 일입니다.


* 장자 : 큰 부자를 점잖게 이르는 말. ※억만장자

* 일수 : 그날의 운스

* 빗밋이 : 좀 기운 듯하게(비스듬히)

* 관 : 무게의 단위로 한 근의 10배 ( 약 3.75Kg)

* 솟을대문 : 행랑채의 지붕보다 높이 솟게 지은 대문. ※행랑채 : 대문 옆에 있는 집채

* 옹색하다 : 집이나 방 따위의 자리가 비좁고 답답하다 / 형편이 넉넉하지 못하여 생활에 필요한 것이 없거나 부족하다.

* 좌판 : 땅에 늘어놓고 않게 된 널조각 / 팔기 위하여 물건을 벌여 놓은 널조각

* 휘뚝휘뚝 : 넘어질 듯이 자꾸 한쪽으로 쏠리거나 이리저리로 흔들리는 모양

* 미상불(未嘗不) : 아닌게 아니라 과연

* 거판지다 : 꽤 크다

* 아름 : 두 팔을 둥글게 모아서 만든 둘레

* 자 , 치 : 한 자는 약 30cm, 한 치는 약 3cm

* 용(茸) : 새로 돋은 사슴의 연한 뿔, 양기를 보충하고 근골을 강하게 하는 보약으로 쓰인다.

* 저혈(猪血) : 돼지 피

* 장혈(獐血) : 노루 피

* 장복(長服) : 같은 약이나 음식를 오랫동안 먹음

* 홍안백발 : 늙어서 머리가 세었으나 얼굴은 붉고 윤이 나는 모습

* 초리 : 어떤 물체의 가늘고 뾰족한 끝부분

* 부리 : 새나 일부 짐승의 주둥이

* 탕건 : 벼슬아치가 갓 아래 받쳐 쓰던 관의 하나.

* 운두 : 그릇이나 신 따위의 둘레나 높이

* 개화장(開化杖) : 구한말에 서양문물의 영향을 받아 유행했던 짧은 지팡이

* 합죽선(合竹扇) : 접었다 폈다 하는 부채


 수부귀다남자(壽富貴多男子) = 수복강녕 부귀다남(壽福康寧 富貴多男)

    = 장수하고 건강하고 평안하며 부귀하고 사내아이가 많아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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