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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글 읽기/채만식-태평천하

채만식 '태평천하' 3 - 알고 보니 참 기가......

by 구름은 자유롭다 2024. 2.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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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윤직원 영감 귀택지도(歸宅之圖)-3

 

  알고 보니 참 기가 막힙니다. 도 할 사람이 따로 있지요. 웬만하면, 허허! 하고 한바탕 웃어 젖힐 노릇이겠지만 점잖은 어른 앞에서 그럴 수는 없고, 그래 히죽이 웃기만 합니다.

 

    "……그리서 나넌 그렇기 처분대루, 응……? 맘대루 말이네. 맘대루 허라구 허길래, 아 인력거 삯 안 주어도 갱기찮헌 종 알구서, 그냥 가라구 히였지!"

 

  인력거꾼은 이 어른이 끝끝내 농을 하느라고 이러는가 했지만, 윤직원 영감의 안색이며 말씨며 조금도 그런 내색이 보이지 않습니다.

 

    "……거 참……! 나는 벨 신통헌 인력거꾼도 다아 있다구, 퍽 얌전허게 부았지! 늙은 사람이 욕본다구, 공으루 인력거 태다 주구 허넝 게 쟁히 기특허다구. 이 사람아, 사내대장부가 그렇기 그짓말을 식은 죽 먹듯 헌담 말잉가? 일구이언은 이부지자(一口二言二父之子)라네. 암만히여두 자네 어매(어머니)가 행실이 좀 궂었덩개비네!"

 

  인력거꾼쯤이니 일구이언은 이부지자라는 공자님식의 욕이야 알아듣지 못했겠지만, 자네 어매가 행실이 궂었덩개비네 하는 데는 슬며시 비위가 상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실상 그렇지 않아도 인력거 삯을 주지 않으려고 농인지 진정인지는 모르겠으되, 쓸데없는 승강을 하려 드는 게 심정이 좋지 않은 참인데 게다가 한술 더 떠서, 이건 한다는 소리가 거짓말을 한다는 둥, 또 죽은 부모를 편삿놈이 널〔棺〕머리 들먹거리듯 들먹거리는 데야 누군들 좋아할 이치가 있다구요.

  사실 웬만한 내기가 인력거를 타고 와설랑, 납작한 초가집 앞에서 그따위 수작을 했다가는 인력거꾼한테 되잡혀 가지곤 뺨따구니나 한대 넙죽하니 얻어맞기가 십상이지요.

 

    "점잖은 어른께서 괜히 쇤네 같은 걸 데리구 그러십니다……! 어서 돈장이나 주어 보냅사요! 헤……."

 

  인력거꾼은 상하는 심정을 눅이고 종시 공순합니다. 그러나 그 돈장이란 말이 윤직원 영감한테는 저 히틀러라든지 하는 덕국 파락호(破落號)의 폭탄선언이라는 것만큼이나 놀라운 말입니다.

 

    "머어? 돈장……? 돈장이 무어당가? 대체……." 

    "일 환 한 장 말씀입죠! 헤……."

 

  남은 기가 막혀서 하는 말을, 속없는 인력거꾼은 고지식하게 언해(諺解)를 달고 있습니다.

   

    "헤헤, 나 참, 세상으 났다가 벨일 다아 보겄네……! 아―니 글씨, 안 받어두 졸드키 처분대루 허라던 사람이, 인제넌 마구 그냥 일 원을 달래여? 참 기가 맥히서 죽겠네…… 그만두소. 용천배기 콧구녕으서 마널씨를 뽑아 먹구 말지, 내가 칙살럽게 인력거 공짜루 타겄넝가……! 을매 받을랑가? 바른 대루 말허소!"


* 농(弄) : 실없이 놀리거나 장난으로 하는 말

* 히죽이 : 만족스러운 듯이 슬쩍 한 번 웃는 모양

* 갱기찮허다 : '괜찮다'의 방언(전라)

* 긏다(긏었다) : 좋지 않은 의미로 그러한 상태가 심하다       ※ ㅇ개비네 = ㄴ가 보네(전라방언)

* 승강 : 서로 자기 주장을 고집하여 옥신각신하는 일

* 편삿놈 : 편사 놈    ※ 편사 = 활 쏘는 사람이 편을 나누어 겨루더 일 혹은 그 활 쏘는 사람.

* 널머리 : 널판지 윗부분

* 덕국(德國) : 독일의 한자식 표기(중문)

* 파락호 : 재산이나 세력이 있는 집안의 자손으로 집안의 재산을 몽땅 털어먹는 난봉꾼

* 언해 : 한문을 한글로 풀어서 씀

* 졸드키 : 좋으니 

* 용천배기 : '문둥이' 방언 (전라, 충청)

* 칙살스럽다 : 하는 짓이나 말 따위가 잘고 더러운 데가 있다.


* 편삿놈이 널머리 들먹거리듯 = 당치 않은 것을 들추어 내서 말썽을 부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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