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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글 읽기/현진건-운수 좋은 날

현진건 '운수 좋은 날' 2 - 이 환자가 그러고도......

by 구름은 자유롭다 2023. 11. 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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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환자가 그러고도 먹는 데는 물리지 않았다. 사흘 전부터 설렁탕 국물이 마시고 싶다고 남편을 졸랐다.

    “이런 오라질 년! 조밥도 못 먹는 년이 설렁탕은. 또 처먹고 지랄병을 하게.”

라고, 야단을 쳐보았건만, 못 사주는 마음이 시원치는 않았다. 인제 설렁탕을 사줄 수도 있다. 앓는 어미 곁에서 배고파 보채는 개똥이 (세살먹이)에게 죽을 사줄 수도 있다 - 팔십 전을 손에 쥔 김 첨지의 마음은 푼푼하였다.

 

  그러나 그의 행운은 그걸로 그치지 않았다. 땀과 빗물이 섞여 흐르는 목덜미를 기름주머니가 다된 왜목 수건으로 닦으며, 그 학교 문을 돌아 나올 때였다. 뒤에서 “인력거!” 하고 부르는 소리가 난다. 자기를 불러 멈춘 사람이 그 학교 학생인 줄 김첨지는 한번 보고 짐작할 수 있었다. 그 학생은 다짜고짜

    “남대문 정거장까지 얼마요.”

라고 물었다. 아마도 그 학교 기숙사에 있는 이로 동기방학을 이용하여 귀향하려 함이리라. 오늘 가기로 작정은 하였건만 비는 오고, 짐은 있고 해서 어찌할 줄 모르다가 마침 김첨지를 보고 뛰어나왔음이리라. 그렇지 않으면 왜 구두를 채 신지 못해서 질질 끌고, 비록 고구라 양복일망정 노박이로 비를 맞으며 김첨지를 뒤쫓아 나왔으랴.

    “남대문 정거장까지 말씀입니까.”

하고 김첨지는 잠깐 주저하였다. 그는 이 우중우장도 없이 그 먼 곳을 철벅거리고 가기가 싫었음일까? 처음 것 둘째 것으로 고만 만족하였음일까? 아니다 결코 아니다. 이상하게도 꼬리를 맞물고 덤비는 이 행운 앞에 조금 겁이 났음이다.

 

  그리고 집을 나올 제 아내의 부탁이 마음이 켕기었다 - 앞집 마마님한테서 부르러 왔을 제 병인은 뼈만 남은 얼굴에 유일의 샘물 같은 유달리 크고 움푹한 눈에 애걸하는 빛을 띄우며

    “오늘은 나가지 말아요. 제발 덕분에 집에 붙어 있어요. 내가 이렇게 아픈데…….”

라고, 모기 소리같이 중얼거리고 숨을 걸그렁걸그렁하였다. 그때에 김첨지는 대수롭지 않은듯이

    “아따, 젠장맞을 년, 별 빌어먹을 소리를 다 하네. 맞붙들고 앉았으면 누가 먹여 살릴 줄 알아.”

하고 훌쩍 뛰어나오려니까 환자는 붙잡을 듯이 팔을 내저으며

    “나가지 말라도 그래, 그러면 일찍이 들어와요.”

하고, 목메인 소리가 뒤를 따랐다.


○ 푼푼하다 : 모자람이 없이 넉넉하다

○ 왜목 : 광목 = 무명실로 서양목처럼 너비가 넓게 짠 베

○ 다짜고짜 : 일의 앞뒤 상황이나 사정 따위를 미리 알아보지 아니하고 바로 들이덤벼서

○ 고구라 : 소창(小倉) = 목화솜을 자아 실로 만들고 그 실로 엮어 짠 옷감

○ 노박이로 :  줄곧 한 가지로, 줄곧 계속적으로

○ 우중 : 비가 내리는 가운데

○ 우장 : 비옷

○ 움푹하다 : 가운데가 우묵하게 푹 들어간 데가 있다.

○ 걸그렁걸그렁 : 글거렁글그렁 = 가래 따위가 목구명에 걸려 숨 쉴 때마다 자꾸 거칠게 나는 소리.

○ 젠장맞을 :  제기(제기랄) 난장을 맞을 것이라는 뜻으로 뜻에 맞지 아니하여 불평스러울 때 혼자서 욕으로 하는

    ※ 난장(亂杖) = 고려, 조선 시대에 신체의 부위를 가리지 않고 마구 매로 치던 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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