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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글 읽기/현진건-운수 좋은 날

현진건 '운수 좋은 날' 5 - 전차가 왔다. 김첨지는......

by 구름은 자유롭다 2023. 12.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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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차는 왔다. 김첨지는 원망스럽게 전차 타는 이를 노리고 있었다. 그러나 그의 예감(豫感)은 틀리지 않았다. 전차가 빡빡하게 사람을 싣고 움직이기 시작하였을 타고 남은 손 하나가 있었다. 굉장하게 큰 가방을 들고 있는걸 보면 아마 붐비는 차 안에 짐이 크다 하여 차장에게 밀려 내려온 눈치였다.

  김첨지는 대어섰다.

    “인력거를 타시랍시요.”

  한동안 값으로 승강이를 하다가 육십 전에 인사동까지 태워다 주기로 하였다.

 

  인력거가 무거워지매 그의 몸은 이상하게도 가벼워졌고 그리고 또 인력거가 가벼워지니 몸은 다시금 무거워졌건만 이번에는 마음조차 초조해 온다. 집의 광경이 자꾸 눈앞에 어른거리어 인제 요행을 바랄 여유도 없었다. 나무 등걸이나 무엇 같고 제 것 같지도 않은 다리를 연해 꾸짖으며 질팡갈팡 뛰는 수밖에 없었다. 저놈의 인력거꾼이 저렇게 술이 취해 가지고 이 진땅에 어찌 가노, 라고 길 가는 사람이 걱정을 하리만큼 그의 걸음은 황급하였다.

  흐리고 비 오는 하늘은 어둠침침하게 벌써 황혼에 가까운 듯하다. 창경원 앞까지 다다라서야 그는 턱에 닿은 숨을 돌리고 걸음도 늦추잡았다. 한 걸음 두 걸음 집이 가까워 갈수록 그의 마음조차 괴상하게 누그러웠다. 그런데 이 누그러움은 안심에서 오는 게 아니요 자기를 덮친 무서운 불행을 빈틈없이 알게 될 때가 박두한 것을 두리는 마음에서 오는 것이다. 그는 불행에 다닥치기 전 시간을 얼마쯤이라도 늘이려고 버르적거렸다. 기적(奇蹟)에 가까운 벌이를 하였다는 기쁨을 할 수 있으면 오래 지니고 싶었다.

  그는 두리번두리번 사면을 살피었다. 그 모양은 마치 자기 집 ― 곧 불행을 향하고 달아가는 제 다리를 제 힘으로는 도저히 어찌할 수 없으니 누구든지 나를 좀 잡아 다고, 구해 다고 하는 듯하였다.

 

  그럴 즈음에 마침 길가 선술집에서 그의 친구 치삼이가 나온다. 그의 우글우글 살찐 얼굴에 주홍이 는 듯, 온 턱과 뺨을 시커멓게 구레나룻이 덮였거늘 노르탱탱한 얼굴이 바짝 말라서 여기저기 고랑이 패고 수염도 있대야 턱밑에만 마치 솔잎 송이를 거꾸로 붙여 놓은 듯한 김첨지의 풍채하고는 기이한 대상을 짓고 있었다.

    “ 여보게 김첨지, 자네 문안 들어갔다 오는 모양일세그려. 돈 많이 벌었을테니 한잔 빨리게.”

  뚱뚱보는 말라깽이를 보던 맡에 부르짖었다. 그 목소리는 몸집과 딴판으로 연하고 싹싹하였다. 김첨지는 이 친구를 만난 게 어떻게 반가운지 몰랐다. 자기를 살려 준 은인이나 무엇같이 고맙기도 하였다.

    “자네는 벌써 한잔한 모양일세그려. 자네도 오늘 재미가 좋아 보이.”

하고 김첨지는 얼굴을 펴서 웃었다.

    “아따, 재미 안 좋다고 술 못 먹을 낸가. 그런데 여보게, 자네 왼몸이 어째 물독에 빠진 새앙쥐 같은가. 어서 이리 들어와 말리게.”


* 제 : '적에' 의 줄임말

* 대어서다 : 어떤 것을 목표로 삼거나 향하여 서다.

* 등걸이 : 의자의 등 부분에 씌우는 덮개

* 황급하다 : 몹시 급하여 한 가지 일에 몰두할 마음의 여유가 없다.

* 누그러움 : 너그러움 = 마음이 넓고 아량이 있다.

* 버르적거리다 : 고통스러운 일이나 어려운 고비에서 벗어나려고 팔다리를 내저으며 몸을 반복적으로 움직이다.

* 선술집 : 술탁자 앞에 선 채로 간단하게 술을 마실 수 있는 술집

* 우글우글 : 벌레나 짐승, 사람 따위가 한곳에 빽빽하게 모여 움직이는 모양

* 노르탱탱하다 : '노르댕댕하다'의 방언 = 고르지 않고 노르스름하다.

* 고랑 : 두둑한 땅과 땅 사이에 좁게 들어간 곳

* 덧 : '거듭' 또는 '겹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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