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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글 읽기/현진건-운수 좋은 날

현진건 '운수 좋은 날' 8 - 치삼은 어이없이......

by 구름은 자유롭다 2023. 12.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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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치삼은 어이없이 주정뱅이를 바라보며

    “금방 웃고 지랄을 하더니 우는 건 또 무슨 일인가.”

  김첨지는 연해 코를 들이마시며

    “우리 마누라가 죽었다네.”

    “뭐, 마누라가 죽다니, 언제?”

    “이놈아 언제는, 오늘이지.”

    “엣기 미친놈, 거짓말 말아.”

    “거짓말은 왜, 참말로 죽었어, 참말로…… 마누라 시체를 집에 뻐들쳐 놓고 내가 술을 먹다니, 내가 죽일 놈이야, 죽일 놈이야.”

하고 김첨지는 엉엉 소리를 내어 운다. 치삼은 흥이 조금 깨어지는 얼굴로

    “원 이 사람이, 참말을 하나 거짓말을 하나. 그러면 집으로 가세, 가.”

하고 우는 이의 팔을 잡아당기었다. 치삼의 끄는 손을 뿌리치더니 김첨지는 눈물이 글썽글썽한 눈으로 싱그레 웃는다.

    “죽기는 누가 죽어.”

하고 득의가 양양.

    “죽기는 왜 죽어, 생때같이 살아만 있단다. 그 오라질 년이 밥을 죽이지. 인제 나한테 속았다.”

하고 어린애 모양으로 손뼉을 치며 웃는다.

    “이 사람이 정말 미쳤단 말인가. 나도 아주먼네가 앓는단 말은 들었는데.”

하고 치삼이도 어느 불안을 느끼는 듯이 김첨지에게 또 돌아가라고 권하였다.

    “안 죽었어, 안 죽었대도 그래.”

  김첨지는 화증을 내며 확신 있게 소리를 질렀으되 그 소리엔 안 죽은 것을믿으려고 애쓰는 가락이 있었다. 기어이 일 원 어치를 채워서 곱배기 한 잔씩 더 먹고 나왔다.

  궂은비는 의연히 추적추적 내린다.

  김첨지는 취중에도 설렁탕을 사가지고 집에 다다랐다. 집이라 해도 물론 셋집이요 또 집 전체를 세든 게 아니라 안과 뚝 떨어진 행랑방 한 간을 빌려 든 것인데 물을 길어 대고 한 달에 일 원씩 내는 터이다.

  만일 김첨지가 주기를 띠지 않았던들 한 발을 대문에 들여놓았을 제 그곳을 지배하는 무시무시한 정적(靜寂) ― 폭풍우가 지나간 뒤의 바다 같은 정적이 다리가 떨렸으리라. 쿨룩거리는 기침 소리도 들을 수 없다. 그르렁거리는 숨소리조차 들을 수 없다. 다만 이 무덤 같은 침묵을 깨뜨리는 ― 깨뜨린다느니보다 한층 더 침묵을 깊게 하고 불길하게 하는 빡빡 하는 그윽한 소리, 어린애의 젖 빠는 소리가 날 뿐이다. 만일 청각(聽覺)이 예민한 이 같으면 그 빡빡소리는 빨 따름이요, 꿀떡꿀떡 하고 젖 넘어가는 소리가 없으니 빈 젖을 빤다는 것도 짐작할는지 모르리라.


* 주정뱅이 : '주정쟁이'를 낮추어 비하하는 말

    ※ ~쟁이 = 어떤 속성을 많이 가진 사람을 뜻을 더하는 접미사

    ※ 주정(酒 술 주 / 酊 술 취할 정) 술에 취하여 정신 없이 말하거나 행동함.

* 싱그레 : 눈과 입을 슬며시 움직이며 소리 없이 부드럽게 웃는 모양

* 생때 : '생떼' 의 속어, 특별한 까닭도 없이 무리하게 쓰는 억지를 부리는 것

* 주기 : (酒 술 주 / 氣 기운 기) 술기운

* 그르렁 : 목구멍에 가래 따위가 걸려 숨을 쉴 때 거치적거리는 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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