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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글 읽기/현진건-운수 좋은 날

현진건 '운수 좋은 날' 9 - 혹은 김첨지도......

by 구름은 자유롭다 2023. 12.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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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혹은 김첨지도 이 불길한 침묵을 짐작했는지도 모른다. 그렇지 않으면 대문에 들어서자마자 전에 없이

    “이 난장맞을 년, 남편이 들어오는데 나와 보지도 않아, 이 오라질 년.”

이라고 고함을 친 게 수상하다. 이 고함이야말로 제 몸을 엄습해 오는 무시무시한 을 쫓아 버리려는 허장성세인 까닭이다. 하여간 김첨지는 방문을 왈칵 열었다.

  구역을 나게 하는 추기 ― 떨어진 삿자리 밑에서 나온 먼지내 빨지 않은 기저귀에서 나는 똥내와 오줌내 가지각색 때가 켜켜이 앉은 옷내 병인의 땀 썩은 내가 섞인 추기가 무딘 김첨지의 코를 찔렀다. 방 안에 들어서며 설렁탕을 한구석에 놓을 사이도 없이 주정꾼은 목청을 있는 대로 다 내어 호통을 쳤다.

     “이런 오라질 년, 주야장천 누워만 있으면 제일이야. 남편이 와도 일어나지를 못해.”

라는 소리와 함께 발길로 누운 이의 다리를 몹시 찼다. 그러나 발길에 채이는 건 사람의 살이 아니고 나무등걸과 같은 느낌이 있었다.

  이때에 빽빽 소리가 응아 소리로 변하였다. 개똥이가 물었던 젖을 빼어 놓고 운다. 운대도 온 얼굴을 찡그려 붙여서 운다는 표정을 할 뿐이다. 응아 소리도 입에서 나는 게 아니고 마치 뱃속에서 나는 듯하였다. 울다가 울다가 목도 잠겼고 또 울 기운조차 시진한 것 같다.

  발로 차도 그 보람이 없는 걸 보자 남편은 아내의 머리맡으로 달려들어 그야말로 까치집 같은 환자의 머리를 꺼들어 흔들며

    “이년아, 말을 해, 말을! 입이 붙었어, 이 오라질 년!”

    “……”

    “으응, 이것 봐, 아무 말이 없네.”

    “……”

    “이년아, 죽었단 말이냐, 왜 말이 없어.”

    “……”

    “으응, 또 대답이 없네. 정말 죽었나 버이.”

  이러다가 누운 이의 흰 창을 덮은 위로 치뜬 눈을 알아보자마자

    “이 눈깔! 이 눈깔! 왜 나를 바라보지 못하고 천장만 보느냐, 응.”

하는 말 끝엔 목이 메였다. 그러자 산 사람의 눈에서 떨어진 닭의 똥 같은 눈물이 죽은 이의 뻣뻣한 얼굴을 어룽어룽 적시었다. 문득 김첨지는 미친 듯이 제 얼굴을 죽은 이의 얼굴에 한데 비비대며 중얼거렸다.

    “설렁탕을 사다 놓았는데 왜 먹지를 못하니, 왜 먹지를 못하니…… 괴상하게도 오늘은! 운수가, 좋더니만…….”

- 끝 - 


* 난장맞을 : 난장을 맞을 만하다, 아주 몹쓸, 몹시 못마땅할 때 욕으로 하는 말

    ※ 난장(亂杖) = 신체 부위를 가리지 않고 마구 매질을 하는 것

* 엄습(掩襲) : 뜻하지 않은 사이에 습격함.

* 증 : 병이 들었을 때 보이는 여러 가지 상태나 모양 , 갑자기 화를 내는 증세, 싫은 생각이나 느낌 혹은 반응

* 허장성세(虛張聲勢) : 실속은 없으면서 큰소리치거나 허세를 부림

* 왈칵 : '왈카닥'의 준말. 갑자기 힘껏 잡아당기거나 밀치는 모양

* 추기 : 송장이 썩어서 흐르는 물

* 삿자리 : 갈대를 얶어서 만든 자리

* 켜켜이 : 켜마다 

    ※ 켜 = 포개어진 물건의 하나하나의 층

* 주야장천(晝夜長川) : 밤낮으로 쉬지 아니하고 연달아

* 등걸 : 줄기를 잘라 낸 나무의 밑동, 그루터기 

* 시진(澌盡) : 기운이 빠져 없어짐

* 어룽어룽 : 눈물이 그득하여 넘칠 듯한 모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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