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응형 일제강점기36 채만식 '태평천하' 28 - 밥상을 받은 윤직원 영감은...... 밥상을 받은 윤직원 영감은 방 안을 한바퀴 휘휘 둘러보더니, "태식이는 어디 갔느냐?" 하고 누구한테라 없이 띄워 놓고 묻습니다. 윤직원 영감이 인간 생긴 것치고 이 세상에서 제일 귀애하는 게 누구냐 하면, 시방 어디 갔느냐고 찾는 태식입니다. 지금 열다섯 살이고 나이로는 증손자 경손이와 동갑이지만, 아들은 아들입니다. 그러나 본실 소생은 아니고, 시골서 술에미〔酒女〕를 상관한 것이 그걸 하나 보았던 것입니다. 배야 뉘 배를 빌려 생겨났든 간에 환갑이 가까워서 본 막내둥이니, 아버지로 앉아서야 이뻐할 건 당연한 노릇이겠지요. 하물며 낳은 지 삼칠일 만에 어미한테서 데려다가 유모를 두고 집안의 뭇 눈치 속에서 길러 낸 천덕꾸러기니, 여느 자식보다 불쌍히 여겨서라도 한결 귀애할 게 아니겠다구요. .. 2024. 10. 5. 채만식 '태평천하' 27 - 윤직원 영감은 그처럼...... 5. 마음의 빈민굴 윤직원 영감은 그처럼 부민관의 명창대회로부터 돌아와서, 대문 안에 들어서던 길로 이 분풀이, 저 화풀이를 한데 얹어 그 알뜰한 삼남이 녀석을 데리고 며느리 고씨더러, 짝 찢을 년이니 오두가 나서 그러느니 한바탕 귀먹은 욕을 걸찍하게 해주고 나서야 적이 직성이 풀려, 마침 또 시장도 한 판이라 의관을 벗고 안방으로 들어갔습니다. 아랫목으로 펴놓은 돗자리 위에 방 안이 온통 그들먹하게시리 발을 개키고 앉아 있는 윤직원 영감 앞에다가, 올망졸망 사기 반상기가 그득 박힌 저녁상을 조심스레 가져다 놓는 게 둘째손자며느리 조씹니다. 방금, 경찰서장감으로 동경 가서 어느 사립대학의 법과에 다니는 종학(鍾學)의 아낙입니다. 서울 태생이요 조대비의 서른일곱촌인지 아홉촌인지 되는 양반집 규수요,.. 2024. 9. 25. 채만식 '태평천하' 26- 윤두꺼비는 이윽고...... 윤두꺼비는 이윽고 세상이 평안한 뒤엔 집안의 문벌 없음을 섭섭히 여겨 가문을 빛나게 할 필생의 사업으로 네 가지 방책을 추렸습니다. 맨 처음은 족보에다가 도금(鍍金)을 했습니다. 그럼직한 일가들을 추겨 가지고 보소(譜所)를 내놓고는, 윤두섭의 제 몇 대 윤아무개는 무슨 정승이요, 제 몇 대 윤아무개는 무슨 판서요, 제 몇 대 아무는 효자요, 제 몇 대 아무 부인은 열녀요, 이렇게 그럴싸하니 족보(族譜)를 새로 꾸몄습니다. 땅 짚고 헤엄치기지요. 그러노라고 한 이천 원 돈이 들었습니다. 그렇지만 일이 수나로운 만큼, 그러한 족보 도금이야 조상 치레나 되었지, 그리 신통할 건 없었습니다. 아무 데 내놓아도 말대가리 윤용규 자식 윤두꺼비요, 노름꾼 윤용규의 자식 윤두섭인걸요. 자연, 허천 들린 뱃속처럼 .. 2024. 9. 5. 채만식 '태평천하' 23 - 일은 그런데 피자파장이어서...... 일은 그런데 피장파장이어서 화적패도 또한 말대가리 윤용규에게 원한이 있습니다. 동료 박가를 찔러서 잡히게 했다는 것입니다. 박가가 잡혀가서 그 모진 혹형을 당하면서도 구혈이나 두목이나 도당의 성명을 불지 않는 것은 불행 중 다행입니다. 그러니 그런 만큼 의리가 가슴에 사무치지 않을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윤용규한테 대한 원한은 우선 접어 놓고 어디 일을 좀 무사히 펴이게 하도록 해볼까 하는 것이 그들의 첫 꾀였습니다. 만약 그런 꾀가 아니라면야 들어서던 길로 지딱지딱 해버리고 돌아섰을 것이지요. 두목은 윤용규가 전번과는 달라 악이 바싹 올라 가기고 처음부터 발딱거리면서 뻣뻣이 말을 못 듣겠노라고 버티는 데는 물큰 화가 치밀어 오르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진정이냐" 그는 눈을 부라.. 2024. 8. 4. 채만식 '태평천하' 20 - 사실 윤용규는...... 4. 우리만 빼놓고 어서 망해라-6 사실 윤용규는 무식하고 소박하나마 시대가 차차로 금권이 유세해 감을 막연히 인식을 했던 것입니다. 그것은 그러므로 비단 화적떼에게만 대한 선언인 것이 아니라, 그 야속하고 토색질을 방자히 하는 수령까지도 넣어, 전 압박자에게 대고 부르짖는 선전의 포고이었을 것입니다. 가령 그 자신이 그것을 의식하고 못 하고는 고만두고라도...... 말입니다. "......이놈들! 밤이 어둡다구, 백년 가두 날이 안 샐 줄 아느냐? 두구 보자, 이놈들!" 윤용규는 연하여 이렇게 살기등등하니 악을 쓰는 것입니다. "하, 이놈, 희떠운 소리 헌다! 허!" 두목은 서글퍼서 이렇게 헛웃음을 치는데, 마침 윗목에서 이제껏 자고 있던 차인꾼이 그제야 잠이 깨어 푸스스 일어나다가 한참 .. 2024. 7. 15. 채만식 '태평천하' 19 - 사랑채로 들어간 두목이...... 4. 우리만 빼놓고 어서 망해라-5 사랑채로 들어간 두목이 한 수하를 시켜 웃미닫이를열어 젖히고서 성큼 마루로 올라설 때에 그는 뜻밖에도 이편을 앙연히 노려보고 있는 말대가리 윤용규와 눈이 딱 마주쳤습니다. 두목은 주춤하지 않지 못했습니다. 그는 윤용규가 이 위급한 판에 한 발자국이라도 도망질을 치려고 서둘렀지, 이 다지도 대담하게, 오냐 어서 오란 듯이 버티고 있을 줄은 천만 생각 밖이었던 것입니다. 더욱 핏기 없이 수척한 얼굴에 병색을 띠고서도 일변 악이 잔뜩 올라 이편을 노려보는 그 머리 센 늙은이의 살기스런 양자가 희미한 쇠기름불에 어른거리는 양이라니 무슨 원귀와도 같습니다. 두목은 만약 제 등뒤에 수하들이 겨누고 있는 십여 대의 총부리와 녹슬었으나마 칼들과 몽둥이들과 도끼들이 없었으면.. 2024. 7. 1. 채만식 '태평천하' 18 - 화적이 인가를 쳐들어와서...... 4. 우리만 빼놓고 어서 망해라-4 화적이 인가를 쳐들어와서 잡아 족치는 건 그 집 대주(戶主)와 셈든 남자들이다. 그래서 그들의 손에 붙잡히기만 하고 보면 우선......(원문탈락)...... 반죽음은 되게 매를 맞아야 합니다. 그렇게 얻어맞고도 마침내는 재물은 재물대로 뺏겨야 하고 그 서슬에 자칫 잘못하면 목숨이 왔다갔다합니다. 둘이 잡히면 둘이 다, 셋이 잡히면 셋이 다 그 지경을 당합니다. 그러므로 제가끔 먼저 기수를 채는 당장으로 아비를 염려해서 주춤거리거나 자식을 생각하여 머뭇거리거나 할 것이 없이 그저 먼저 몸을 피해 놓고 보는 게 당연한 일로 되어 있었습니다. 그럴 것이, 가령 자식이 아비의 위태로움을 알고 그냥 버틴다거나 덤벼든다거나 했자, 저편은 수효가 많은데다가 병장기를 가.. 2024. 6. 23. 이전 1 2 3 4 5 6 다음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