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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0년대17

채만식 '태평천하' 33 - 고씨는 그리하여, 그처럼...... 6. 관전기(觀戰記)  고씨는 그리하여, 그처럼 오랫동안 생수절을 하고 살아오다가 마침내 단산(斷産)할 나이에 이르렀습니다. 여자 아닌 여자로 변하는 때지요. 이때를 당하면 항용의 좋은 부부생활을 해오던 여자라도 히스테리라든지 하는 이상야릇한 병증이 생기는 수가 많답니다. 그런 걸 고씨로 말하면, 이십오 년 청춘을 홀로 늙히다가, 이제 바야흐로 여자로서의 인생을 오늘 내일이면 작별하게 되었은즉, 가령 히스테리를 젖혀 놓고 보더라도 마음이 안존할 리가 없을 건 당연한 노릇이겠지요. 윤직원 영감의 걸찍한 입잣대로 하면, 오두가 나는 것도 그러므로 무리가 아닐 겝니다.   그러한데다가, 자아, 집안 살림을 맡아서 하니 그 재미를 봅니까. 자식들이라야 다 장성해서 뿔뿔이 흩어져 살고 어미는 생각도 않지요. 손자.. 2024. 12. 18.
채만식 '태평천하' 32 - 사람마다 이상한...... 사람마다 이상한 괴벽은 다 한 가지씩 있게 마련인지, 윤주사 창식도 야릇한 편성이 하나 있습니다.  그가 마음이 그렇듯 활협하고 남의 청을 거절 못 하는 인정 있는 구석이 있다는 소문을 듣고서, 어느 교육계의 명망유지 한 사람이 그의 문을 두드린 일이 있었습니다. 소간은 그 명망유지 씨가 후원을 하고 있는 사학(私學) 하나가 있는데, 근자 재정이 어렵게 되어 계제에 돈을 한 이십만 원 내는 특지가가 있으면 그 나머지는 달리 수합을 해서 재단의 기초를 완성시키겠다는 것이고, 그러니 윤주사더러 다 좋은 사업인즉 십만 원이고 이십만 원이고 내는 게 어떠냐고, 참 여러 가지 말과 구변을 다해 일장 설파를 했습니다. 윤주사는 자초지종 그러냐고, 아 그러다뿐이겠느냐고, 연해 맞장구를 쳐주어 가면서 듣고 있다가 급기.. 2024. 12. 4.
채만식 '태평천하' 30 - 이 고씨는, 말하자면 이 세상...... 이 고씨는, 말하자면 이 세상 며느리의 썩 좋은 견본이라고 하겠습니다.    ---암캐 같은 시어머니, 여우나 꽁꽁 물어 가면 안방 차지도 내 차지, 곰방조대도 내 차지.  대체 그 시어머니라는 종족이 며느리라는 종족한테 얼마나 야속스러운 생물이거드면, 이다지 박절할 속담까지 생겼습니다.   열여섯 살에 시집을 온 고씨는 올해 마흔일곱이니, 작년 정월 시어머니 오씨가 죽는 날까지 꼬박 삼십일 년 동안 단단히 그 시집살이라는 걸 해왔습니다.  사납대서 살쾡이라는 별명을 듣고, 인색하대서 진지리꼽재기라는 별명을 듣고, 잔말이 많대서 담배씨라는 별명을 듣고 하던 시어머니 오씨(그러니까 바로 윤직원 영감의 부인이지요), 그 손 밑에서 삼십일 년 동안 설운 눈물 많이 흘리고 고씨는 시집살이를 해오다가, 작년 정월.. 2024. 11. 4.
채만식 '태평천하' 29 - 반주 석잔이 끝난 뒤에 윤직원 영감은...... 반주 석잔이 끝난 뒤에 윤직원 영감은 비로소 금으로 봉을 박은 은숟갈을 뽑아 들고 마악 밥을 뜨려다가 문득 고개를 쳐들더니 심상찮게 두 손자며느리를 건너다봅니다.     "아―니, 야덜아……." 내는 말조가 과연 졸연찮습니다.     "……늬들, 왜 내가 시키넌 대루 않냐? 응?"   두 손자며느리는 벌써 거니를 채고서 고개를 떨어뜨립니다. 윤직원 영감은 밥이 새하얀 쌀밥인 걸 보고서, 보리를 두지 않았다고 그걸 탄하던 것입니다.     "……보리, 벌써 다아 먹었냐?"    "안직 있어요!"   맏손자며느리가 겨우 대답을 합니다.     "워너니 아직 있을 티지…… 그런디, 그러먼 왜 이렇기 맨쌀만 히여 먹냐? 응?" 조져도 아무도 대답이 없습니다.     "……그래, 내가 허넌 말은 동네 개 짖넌 소.. 2024. 10. 21.
채만식 '태평천하' 28 - 밥상을 받은 윤직원 영감은...... 밥상을 받은 윤직원 영감은 방 안을 한바퀴 휘휘 둘러보더니,     "태식이는 어디 갔느냐?" 하고 누구한테라 없이 띄워 놓고 묻습니다. 윤직원 영감이 인간 생긴 것치고 이 세상에서 제일 귀애하는 게 누구냐 하면, 시방 어디 갔느냐고 찾는 태식입니다. 지금 열다섯 살이고 나이로는 증손자 경손이와 동갑이지만, 아들은 아들입니다. 그러나 본실 소생은 아니고, 시골서 술에미〔酒女〕를 상관한 것이 그걸 하나 보았던 것입니다. 배야 뉘 배를 빌려 생겨났든 간에 환갑이 가까워서 본 막내둥이니, 아버지로 앉아서야 이뻐할 건 당연한 노릇이겠지요. 하물며 낳은 지 삼칠일 만에 어미한테서 데려다가 유모를 두고 집안의 뭇 눈치 속에서 길러 낸 천덕꾸러기니, 여느 자식보다 불쌍히 여겨서라도 한결 귀애할 게 아니겠다구요.   .. 2024. 10. 5.
채만식 '태평천하' 27 - 윤직원 영감은 그처럼...... 5. 마음의 빈민굴  윤직원 영감은 그처럼 부민관의 명창대회로부터 돌아와서, 대문 안에 들어서던 길로 이 분풀이, 저 화풀이를 한데 얹어 그 알뜰한 삼남이 녀석을 데리고 며느리 고씨더러, 짝 찢을 년이니 오두가 나서 그러느니 한바탕 귀먹은 욕을 걸찍하게 해주고 나서야 적이 직성이 풀려, 마침 또 시장도 한 판이라 의관을 벗고 안방으로 들어갔습니다.   아랫목으로 펴놓은 돗자리 위에 방 안이 온통 그들먹하게시리 발을 개키고 앉아 있는 윤직원 영감 앞에다가, 올망졸망 사기 반상기가 그득 박힌 저녁상을 조심스레 가져다 놓는 게 둘째손자며느리 조씹니다. 방금, 경찰서장감으로 동경 가서 어느 사립대학의 법과에 다니는 종학(鍾學)의 아낙입니다.  서울 태생이요 조대비의 서른일곱촌인지 아홉촌인지 되는 양반집 규수요,.. 2024. 9. 25.
채만식 '태평천하' 26- 윤두꺼비는 이윽고...... 윤두꺼비는 이윽고 세상이 평안한 뒤엔 집안의 문벌 없음을 섭섭히 여겨 가문을 빛나게 할 필생의 사업으로 네 가지 방책을 추렸습니다.   맨 처음은 족보에다가 도금(鍍金)을 했습니다. 그럼직한 일가들을 추겨 가지고 보소(譜所)를 내놓고는, 윤두섭의 제 몇 대 윤아무개는 무슨 정승이요, 제 몇 대 윤아무개는 무슨 판서요, 제 몇 대 아무는 효자요, 제 몇 대 아무 부인은 열녀요, 이렇게 그럴싸하니 족보(族譜)를 새로 꾸몄습니다. 땅 짚고 헤엄치기지요. 그러노라고 한 이천 원 돈이 들었습니다.  그렇지만 일이 수나로운 만큼, 그러한 족보 도금이야 조상 치레나 되었지, 그리 신통할 건 없었습니다. 아무 데 내놓아도 말대가리 윤용규 자식 윤두꺼비요, 노름꾼 윤용규의 자식 윤두섭인걸요. 자연, 허천 들린 뱃속처럼 .. 2024. 9.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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